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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5-25
 제목  기미독립선언과 천도교 기독교의 관계
 주제어  3.1운동 민족대표 33인 [한국사] [삼일운동]
 자료출처  이경재  성경본문  
 내용

1. 머리말

3.1 기미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일제강점 하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한국인의 민족적 항일 독립운동으로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이라고도 한다. 한일합병(1910) 이후 일제의 무단정치에 산발적으로 항거해 오던 한국인은 제1차세계대전 후 미국의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되어, 19년 3월 1일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대표 33명의 〈독립선언서〉 발표와 시위운동의 촉발로 거족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일으켰으나, 일본군대의 출동으로 좌절되었다. 3 . 1 운동 이후 3개월 간의 전국 독립만세 시위운동 상황을 보면 참가인원 2,023,080 명, 사망 7,509 명, 부상 15,961명, 투옥 46,948명의 희생을 치렀다. 삼일운동의 민족정기는 그 후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하여 국내외에서 조직된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으며, 우리나라의 근대 시민혁명 의식과 자주독립적인 국민국가의 수립, 민족의 통일을 위한 민족정신으로 오늘날까지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3 1운동은 처음에 종교단체와 학생들에 의해서 각각 독자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까닭은 일제가 무단정치를 실시한 이래 국내의 사회 단체 대부분이 해체되었지만, 종교! 단체와 교육기관은 비교적 활동이 자유롭고 조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종교에 의지하거나 교육에 힘쓰면서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단체 중에서 조직력이 강한 천도교(天道敎)와 기독교(基督敎)와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독립운동의 계획을 세우다가, 후에 서로 다른 계통의 활동상황을 알게 되자 이를 통합, 단일 추진계획이 세워지게 되었다.

2. 본론

1) 천도교와 독립운동

  천도교측의 계획은 손병희(孫秉熙)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천도교는 동학(東學)의 후신으로서 제3세 교주가 된 손병희가 일본 동경(東京)에 망명해 있을 때 교명(敎名)을 개칭한 것이다. 그는 1906년 1월에 귀국하여 교세확장에 여러 모로 힘을 기울여 오다가, 1918년 말경 파리강화회의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자 독립운동을 일으킬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등과 여러 차례 만나 대체적인 합의를 본 것 같다. 그리고 천도교내의 결속을 목적으로 다음 해 1월 5일부터 49일간의 연성기도회(煉性祈禱會)를 열었다. 그러나 이 때에는 거사에 대한 구체적인 추진계획은 없었던 것 같다.  이들은 1월 하순경 독립운동의 3대 원칙으로서 대중화(大衆化)할 것 일원화(一元化)할 것 비폭력(非暴力)으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실천방법은 2월 초에 천도교측의 최린이 중앙학교측의 송진우(宋鎭禹) 현상윤(玄相允)과 만나 논의하여, 첫째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발표하여 국민의 여론을 환기하고, 둘째 일본정부와 귀(貴) 중(衆) 양원(兩院) 및 조선총독에게 국권반환요구서(國權! 返還要求書)를 보내고, 셋째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제출하여 국제여론에 의하여 일본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독립을 성취하기로 합의하였다. 천도교측은 처음 계획을 합의할 때 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단독으로 거사하는 것은 불가하므로, 각 종교단체와 대한제국 시대의 저명인사들을 민족대표로 내세워야 한다는데 의견을 일치를 보았다. 그리하여 박영효(朴泳孝) 한규설(韓圭卨) 윤용구(尹用求) 김윤식(金允植) 윤치호(尹致昊) 등을 참여시키기 위해 교섭하였으나 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실질적으로 천도교측의 독립운동을 추진해 오던 송진우 최린 현상윤 최남선 등은 평북 정주에 있는 이승훈(李昇薰)에게 연락하였다. 그리하여 이승훈은 2월 11일 상경하여 송진우 신익희(申翼熙) 등과 만나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합류에 찬성하고 그 이튿날 선천에 내려가 기독교측의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결과 천도교측에서 기미독립선언서에 관계한 지도자들은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에 걸쳐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과 을 비롯하여 재경(在京) 또는 지방간부로써 서울에 와 있는 이종일(李種一) 박준승(朴準承) ! 나인협(羅仁協) 임예환(林禮煥) 이종훈(李鍾勳) 권병덕(權秉悳) 양한묵(梁? 螳? 김완규(金完圭) 홍기조(洪基兆) 홍병기(洪秉箕) 나용환(羅龍煥) 등을 포함하여 모두 15명이 서명하였다.

2) 기독교와 독립운동

  기독교측의 계획은 처음에는 평안도 지방의 장로교 계통과 서울의 감리교 계통을 중심으로 한두 갈래의 움직임이 있었다. 평안도에서는 중국에서 파견된 선우혁(鮮于赫)이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고하였으므로, 이승훈은 동지들과 협의하여 계획을 세웠는데 때 마침 천도교측의 연락을 받고 상경하여 천도교측과 접촉함으로써 기독교측의 계획은 천도교측과 합류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의 기독교측은 박희도(朴熙道)와 함태영(咸台永)을 중심으로 감리교 계통의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청년학생들과 연락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기독교청년회(中央基督敎靑年會) 간사로 있던 박희도는 기독교 중심의 청년학생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 계획은 박희도와 이승훈이 만남으로써 통합되었고, 이승훈을 통해 천도교측과 합류하게 되었다. 천도교측과 서울에서 협의하고 합동으로 독립운동의 추진계획을 세우기로 결정한 이승훈은 평안도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2월 17일에 다시 상경하여 송진우를 만났으나 그의 태도가 확실치 못한데 의혹을 품던 차에 박희도를 만났다. 그리하여 박희도의 청년학생단을 중? 으?한 기독교측의 독자적인 운동계획에 참여하기 위해 20일에 박희도의 집에서 오화영(吳華英) 정춘수(鄭春洙) 등과 협의하여 기독교 단독으로 추진계획을 세우기로 하고 그 방법으로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다시 함태영 집에서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인 이갑성(李甲成) 등과 회합하였으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2월 21일 최남선이 이승훈와 함께 최린집에 찾아가 협의한 끝에 민족의 행동통일을 위해 합동키로 하였다. 이에 이승훈은 기독교측의 거사준비를 위한 자금으로 5,000원을 천도교측으로부터 받았다. 이날밤 이승훈은 세브란스병원내의 이갑성 숙소에서 10여명의 기독교 간부들과 논의하는 자리에서 그들의 찬동을 얻어 24일 천도교측에게 통고함으로써 마침내 천도교측과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학생측의 추진계획은 1919년 1월 26일경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 박희도가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졸업생 주익(朱翼), 재학생 강기덕(康基德),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金元璧) 윤화정(尹和鼎),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의 윤자영(尹滋英), 세브란스의전(醫專)의 이용설(李容卨), 경성공? ?京城工專)의 주종의(朱種宜), 경성의전(京城醫專)의 김형기(金炯璣) 등 8 명을 관수동 대관원(大觀園)에 초대한 자리에서 대체적인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2월 3일경에는 그 추진계획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대관원에 모였던 학생대표들은 각자가 재학하는 학교와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에게 권고하여 그들을 규합하였다. 그리고 주익이 2월 20일경 독립선언서를 기초해 인쇄하려던 때에 23일 이승훈과 박희도가 천도교측과의 합류를 성공시켰기 때문에 김원벽은 그 원고를 승동예배당(勝洞禮拜堂)에서 불태우고, 학생측도 천도교 기독교측의 추진계획에 참여 협조하기로 하였다. 기독교측에서는 26일경 한강인도교(漢江人道橋)에서 이승훈 양전박 오화영 박희도 안세단 최성모 이필주 등이 모여 서명할 사람을 결정하고, 이승훈 양전박 이명용 유여대 김병조 길선주 신홍식 박희도 오영화 정춘수 이갑성 최성모 김창준 이필주 박동완 신석구 등 16명이 서명하였다.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은 후에 독립선언의 기초이념이 기독교사상이었다는 것을 증언했으며 기독교대표 16인 가운데 감리교 목사였던 신석구는 선언서에 서명하도록 권유를 받았을 때 20여일을 새벽기도를 한뒤 서명했다. 그는 2월27일 새벽기도를 하는데 “4천년 !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내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는 음성을 듣고 서명했다.신목사는 감리교 목사로는 드물게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한 인물로도 유명하다.3·1만세운동에 참여한 기독교대표들은 모두 기도의 역군이자 `한알의 밀알'이 되고자 했다.이승훈은 만세운동으로 일경에 체포된 뒤 공판에서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바가 있으니 오색인종 어느 누가 조국의 흥왕과 종족의 번영을 바라지 아니하며 더욱이 남의 나라의 병합된 자기 나라의 독립을 바라지 아니하겠느냐”고 했다.신흥식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것이니 참고 있을려고 했는데 일본 정부의 비인도적 태도와 총독정치의 핍박을 참을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이스라엘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우리민족의 역사와 대비하고 있던 교회는 3·1만세운동이 한창일 때 `독립단통고문'이란 것을 뿌린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매일 3시에 기도하고 주일은 금식하며 매일 성경을 읽는다.월요일=이사야 10장(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화요일=예레미야12장(유다가 멸망한 원인에 대한 설명),수요일=신명기28장(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에게 침략받아 고통받게 되리라는 예언),목요일=야고보서5장(고난당하는 기독인들에게 기도와 인내할 것을 권면),금요일=이사야59장(죄지은 백성이 회개할때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다는 예언),토요일=로마서8장(성령이 주시는 생명,지금의 고난은 미래의 영광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다)'.

3) 불교와 독립운동
 
  한편, 불교측과의 합의는 최린과 친분이 있는 승려 한용운(韓龍雲)과 협의하여 승낙을 받았다. 이어 한용운은 승려 백용성(白龍城)의 동의를 얻고 유림측의 참가를 위해 곽종석(郭鍾錫)을 찾아갔으나 교섭에 실패해 그들의 합류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후 불교는 기미독립선언에 많은 참여를 하지 못하였고 나중에 한용운의 의지로 선언문에 공약을 첨부하였다.

4). 종교적 단일화와 독립선언

이로써 3 1운동의 주도체는 단일화되었고, 이로부터 추진계획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천도교 기독교 학생측의 개별적인 독립운동 추진계획이 통합되고 불교측이 이에 가담함으로써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 인선(人選)이 시작되었다. 이 33인이 민족대표 이외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사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개인사정이나 또 독립운동의 다음 일을 위하여 서명에서 빠졌다. 그들은 중앙학교의 송진우 현상윤을 비롯하여 정노식 김도태 최남선 임규 박인호 노헌용 김홍규 이경변 함태영(咸台永) 안세환 김세환 김지환 강기덕 김원벽 등 16인이었다.  이렇게 하여 3.1운동의 중앙지도체가 형성되었다. 독립운동 준비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일은 독립선언서의 작성 문제였다. 이 일은 최남선이 최린 현상윤 등과 논의하는 자리에서 자기는 일생을 학자로 마칠 생각이니 독립운동의 표면에는 나서지 않고 선언서를 작성하겠다고 제의하여 찬성을 얻음으로써 민족대표에는 빠지게 되었다. 그 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 초안을 최린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한용운은 독립운동을 책임질 수 없는 최남선이 선언서를 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여 자신! 이 짓겠다고 나섰으나 이미 손질이 끝난 뒤여서 선언서 끝에 한용운의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추가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2월 27일 오후 6시경부터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普成社) 인쇄소에서 공장 감독 김홍규(金弘奎)는 채자(採字)하고, 사장 이종일(李種一)은 교정하여 21,000매를 인쇄하여 경운동(慶雲洞) 이종일 집에 운반하여 두었다가 28일 아침부터 여러 사람에게 분배하여 전국 각지에 전달하였다. 이때 각자가 수수한 매수는 정확치 않으나 서울에는 이갑성이 세브란스의전 학생 김성국(金成國)에게 1,500매를 주어 승동예배당에 가서 강기덕에게 전하게 하였다. 이즈음 승동예배당에는 김원벽 한위건 등 학생대표들이 다수의 전문 중등학생을 집합시켰으므로 이들에게 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서울의 각처에 배포하도록 지시하였는데 그 담당구역을 보면 종로 이북은 불교학생이, 종로 이남은 기독교학생이, 남대문 밖은 천도교학생이 맡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모든 추진계획이 완료되어 그들은 독립선언을 고종 황제의 국장일(國葬日)인 3월 3일에 발표하려 했으나 최종 회합에서 3월 1일로 변경되었다. 그것은 국장일의 거사는 불경(不敬)! 이라 피하되, 국장배관(國葬拜觀) 차 상경한 지방민을 참여시키려면 3일과 가까운 날이어야 하는데 2일은 일요일이라 기독교측에서 피하고자 하므로 결국 3월 1일에 거사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사중 재경 중인 20여명은 2월 28일 밤 재동(齋洞) 손병희 집에 모여 거사계획을 최종적으로 검토하였다. 여기에서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하기로 하였던 당초의 결정을 바꾸어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泰和館, 명월관지점)에서 거행하기로 하였는데 그 까닭은 학생과 민중이 많이 모일 것이므로 일제측과의 충돌이 있을까 염려한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2월 28일 밤까지 모든 계획이 비밀리에 완료되어 3월 1일을 기하여 마침내 거족적인 3 1운동이 폭발하게 되었다.

* 민족대표 33인 [民族代表三十三人]   종교별 분류

* 천도교 측 :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 린등 15명

* 그리스도교측 :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등 16명

* 불교측 : 한용운, 백용성등 2명

3. 맺음말

1) 기미독립운동의 한계

독립운동 후 민족대표에 대한 경성복심원(최종심)은 1921년 9월 20일 개정되어 10월 30일 선고가 내려졌다. 재판과정에서 민족대표들은 모두 독방에 갇혀 심한 고문과 시멘트바닥에서 추위, 더위에 시달려야 했다. 식사도 콩과 보리로 뭉친 5등식(五等式) 한 덩어리와 소금 국물이 전부였다. 이와 같은 옥고로 양한묵은 구속된 해 여름에 옥사하고, 박준승은 21년 옥중에서 고문을 당해 사망했다. 그리고 손병희는 옥중에서 병에 걸려 1921년 5월 19일 사망했다.  해방 50주년인 1995년 8월 독립기념관은 3.1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친일행각으로 논란을 빚어온 박희도, 정춘수 등 2명을 변절한 친일파로 규정, 전시물에 친일행각을 기록한다고 밝혔다. 독립기념관은 또 최린의 약력에도 친일행위를 기록한다고 밝혔다. 독립기념관은 YMCA회원부 간사였던 박희도의 경우 "함흥 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난 뒤 일본의 끊임없는 회유와 강압으로 친일로 돌아섰다"고 기록했다. 감리교 목사 출신인 정춘수는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전향성명서를 내고 풀려나 친일행각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맞았다"고 밝혔다. 정춘수의 친일? 析♣막?1996년 3월 그의 고향 공원에 세워졌던 동상이 시민 학생들에 의해 철거되기도 했다. 이들 외에도 33인 중에는 중추원 참의, 국민총력 조선연맹 이사 등을 지내며 훼절한 최린과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이 모씨가 있었다고 독립운동계와 학계의 일각에서 논란되고 있다. 소수지만 이들의 훼절은 1919년 31항쟁 민족대표의 숭고한 정신에 오점을 남긴 처사로 부끄러운 일이다. 해방후 반민특위 법정에 선 최린은 "독립운동을 선포한 피고가 왜 일제에 협력했는가?"라는 재판장 서순영의 추궁을 받고 "31운동 이후 줄곧 주목과 위협, 유혹을 받아왔다. 물리치지 못한 것이 죄스럽고 부끄러울 뿐이다"고 울먹이며 답변한 바 있다. 이로써 민족대표들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협박과 회유의 대상이었던가를 살필 수 있다. 기미독립선언서를 비롯 3.1항쟁의 각종 문건을 작성하여 '조선의 제퍼슨'이 될뻔 했던 최남선은 일제의 지원으로 잡지 '동명(東明)', 일간 '시대일보' 등 친일언론인으로 모습을 바꾸다가 이어 총독부 조선사편수회위원, 만주건국대 교수 등을 지내며 '친일학자' 로 변신하여 항일민족사에 오점을 남겼다.

2) 한국역사에 있어서 종교의 애국정신

대한민국의 역사의 고난의 현장에서 종교의 역할은 그 어떤 것 보다 중요한 많은 비중을 차지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시대 이후 시대의 정신을 이끌어 온 종교는 그때 그때 고유의 사상적 정신을 토대로 민족의 아픔과 나라의 안위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수했다. 백성이 정신세계로써 백성과 함께 울고 웃으며 한민족의 정신적 체계로써 한 국가의 기틀을 형성하며 유지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특히 이 글에서 다룬 바 있는 기미독립운동에 있어서도 종교의 역할은 민족사랑과 애국정신에 기인하면서 잠자는 한국민중들을 깨우며 독립의 함성을 외쳤다. 기미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한 천도교와 기독교 역시 하나님 나라와 만민평등사상 그리고 이웃사랑 등에 기인한 종교적 정신과 애국정신이 합쳐져 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동학의 잔존인 천도교와 기독교의 부흥의 단계에서 정신적 세계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선각자들의 위해한 리더십과 애국사랑의 정신이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지도자들의 각성과 외침에 발맞추어 시대적 뒤안길에 있던 많은 하층민들과 평민들로 이루어진 민중? 湧?당시 기독교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들에게 있어 기독교 정신은 새로운 삶의 소망을 주었으며 또한 나라사랑의 정신을 갖게 해주었던 것이다. 더욱이 일제치하의 강정기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구약의 이스라엘의 고난과 맞물리면서 가나안을 향한 그들의 출애굽의 여정에 비유되면서 정신적 일치감을 느꼈던 것 같다. 특히 일제치하의 있어서 기독지식인들이 애국사랑의 정신은 시대의 소금과 빛으로써 출애굽의 지도자인 모세처럼 많은 민중들을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과 민족사랑에 기인한 기독교 사상의 정신은 최남선에 의해 독립선언서을 기초하는데 영향을 미쳤고 광복이후 제헌국회 서문에 조차도 하나님나라를 언급하면서 기독교적 정신에 뿌리를 내렸다.  또한 김구선생을 비롯한 많은 선각자들은 성서한국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를 역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서조선의 진리를 외치던 그 외침의 메아리는 이제 서서히 퇴색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그 옛날 빛바랜 시대 속에서 민중을 깨우며 한 나라의 독립과 사랑을 역설했던 선각자들의 정신이 필요로 한 때이다. 기득권만을 차지하려고 했지 진정! 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결핍되었던 유대지도자들처럼 오늘의 시대를 이 끌 정신적 지도자의 부패가 우리를 실망케 하는 때이다. 이러한 때에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그 누가 이 땅에 성서조선을 외쳐야 하겠는가? 한 시대를 이끌 지도자로서의 목회자의 길의 행로에 서있는 우리들이 먼저 기꺼이 광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 옛날 대한독립의 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총칼 앞에 쓰려져 갔던 많은 선인들의 피 앞에는 위대한 지도자들이 있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대적 사명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때에 이 시대의 지도자로써 어떠한 준비와 삶의 실천궁행이 있어야 하는지 각성해보며 실로 이 잠자는 시대에 깨어 기도하며 제2의 종교개혁의 깃발을 올려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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