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원적인 은혜가 독특하게 활동한다고 믿어지는 의식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전을 "보이지 않는 실재(reality)의 보이는 표적"이라고 정의하여 개신교 신학자들과 천주교 신학자들이 이 정의를 인정했지만, 이 정의는 교회가 이 표적들을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으로 믿거나 보이지 않는 실재와 보이는 표적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충분하지 못했다. 이 두 문제점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그리고 개신교 사이를 분열시켰다. 천주교와 동방정교회는 7성사(영세.견진.성체.고해.종부.신품.혼배)를 거행하고, 개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두 성례전(세례와 성찬예식)을 거행한다. 이러한 차이의 이유는 개신교는 두 성례전만을 성서적인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성례전의 적절한 수량의 문제뿐만 아니라 천주교와 개신교의 성려전에 관하가 신학, 즉 성례전의 해석상의 차이를 해소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면 천주교에서는 성례전의 객관적 능력을 강조했는데, 종교개혁자들은 주관적인 믿음을 강조했다. 천주교에서는 영혼에 방해물이 있으면 성례전에서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의 만찬의 빵과 포도주 "안에, 함께, 속에" 구체적으로 임지하신다고 주장했다. 천주교에서 성례전을 적절히 거행해야만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면, 개신교에서는 진정한 교회의 표시가 성례전의 적절한 거행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어떤 개신교 신학자들은 다른 개신교 신학자에게보다 천주교 신학자에게 더욱 가까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천주교 신학은 대중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단이체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복잡성 때문에 천주교와 개신교의 성례전에 관한 신학의 기초가 되는 은혜아 신앙을 잘못 이해하면 안된다. 일반적으로 천주교는 성례전을 성화의 은혜의 통로(수단)로 생각한다. 다른 한편 개신교는 은혜를 하나님의 은사로 생각하며 믿음으로만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의미는 성례전을 정당하게 거행하여 하나님이 약속을 "구현해야"하며 성례전이 이 은혜를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없다면 성례전은 결코 효과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칼빈은 은혜가 하나님의 은사라는 견해의 논리를 발견했다. 성례전의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능처럼 소중하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례전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고 선포해야 한다.
천주교는 개신교의 견해를 성례전의 권위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성례전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주장하기를, 성서가 인정하는 성례전은 필요하지만 성례전은 말씀의 유일한 형식이 아니라고 하였다. 더구나 성례전이 말씀의 유일한 형식이라고 가정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목적으로 하는 선포가 됴 않는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차이는 신앙과 은혜와 하나님의 말씀의 개념 때문이다.
> 참고 항목 : 공로. 공체설. 교회. 사도성. 성만찬. 성화. 세례. 습관. 신앙. 실제적 임재. 은혜. 의인. 주입.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의. 화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