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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신학용어사전  작성일  2007-05-14
 제목  섭리(Providence)
 주제어  섭리 Providence 자유 의지 피조물
 자료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  성경본문  
 내용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사소한 일에와 악인의 악한 일에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일이다. 섭리의 교리를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과 우리들의 삶이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되며 하나님께서는 섭리에 대한 자신의 목적을 그의 아들의 성육신 속에 완전히 드러내셨음을 알 수 있다.

 

교회 곧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이 이 섭리 중에 중점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믿는 자만이 깨닫고 의지하고 감사할 제목이지만 이 섭리는 모든 사소한 일에와 악인의 악한 일에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일이다. 악인이 스스로의 악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의식하지 않고서 행할 때에도 하나님의 섭리는 역사하는 그런 전능하시고 지혜로우신 섭리다.

전통적으로 섭리라는 용어에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세가지 개념들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의 보호 (conservatio)-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그들의 독특한 본질과 능력 안에서 유지하신다는 개념이다.

하나님이 협동(concursus)-하나님은 피조물들을 유지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위 가운데서 능동적으로 협력하신다는 개념으로, 하나님이 협력하시는 방법은 너무나 세밀한 것이어서 피조물들의 모든 행위는 오직 그들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와의 관계속에서만 궁극적으로 성명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gubernatio)-하나님은 피조물들을 인도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그의 계획을 성취하신다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보호]는 창조의 행위 그 자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협동이나 통치의 개념처럼 자주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적이 없었다. 이와같은 사실은 [협동]의 개념이 제1원인과 제2원인의 관계에 대한 모든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는데, 그것들은 인간행위에 관계된 특별히 곤란한 문제들이다. 예를 들면 토마스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행위는 각각의 피조물들의 본성과 욕구에 적합하게 행해지기 때문에 동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와 자유롭고 지적인 존재인 인간들에 대한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가고 자유로운 행위들은 하나님의 행위들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우리들의 의지(will)의 원인일뿐 아니라 우리들의 행위(willing)의 원인이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몰리나(1535-1600년)의 추종자들은 이렇게 믿고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그와같은 주장은 인간의 자유를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협동은 의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의지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일반적이며 지속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칼빈주의자들은 [협동]의 개념을 전적으로 거부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행위는 바로 피조물을 지도하고 일깨우는 것이므로 피조물의 행위가 곧 하나님의 행위라고 말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은 "이것이 결코 인간의 자유를 없앤다는 뜻이 아니다"고 하는 수사학적 표현을 덧붙였긴 하지만 말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칼빈주의자들의 견해를 거부했다. 그리고 사실상 몰리나주의자들의 주장을 신봉했다. 좀더 최근에 와서 바르트는 이런 몰다 전통적인 주장들은 너무도 인과의 절대적 개념에 억눌려 괴롭힘을 당해왔으며, 또한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들과 공존한다는 것을 충분한 정도로 심각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섭리의 개념은 [하나님의 통치]와 동일한 것으로 믿어 왔다. 이 개념은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 체험에 대한 성서적 견해뿐 아니라 역사에 대한 성서적 견해를 가장 자연스럽게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져 왔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인들이 납득하기에는 힘든 개념이다. 또한 그것은 자연법칙, 급진적 자유, 그리고 역사속에 어떤 식별가능한 역사의 형식이 업다고 하는 기본적 개념들과 조화되기에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다. 19세기에는 진보의 개념이 몇몇 사람들에게 섭리에 대한 이와 같은 측면(하나님의 통치)을 해석할 수 있는 한 방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와같은 생각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후에는 설득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몇몇 신학자들은 역사를 예언자들이 해석한 것처럼, 즉 하나님의 전능한 행위라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예언자들과는 달리 이러한 신학자들은 어떤 특정한 행위를 하나님의 행위라고 설명하기에는 현대의 역사가 애매모호하며 복잡한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학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더우기 다른 신학자들은 역사를 위한 어떤 계획이나 목적의 개념은 그 자체가 비성서적인 개념이며, 역사는 끝까지 불확실한 것으로 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바로 이와같은 통차이 성서속의 묵시적 환상 가운데 보존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 참고 항목 : 계약신학. 구속사. 기적. 신정론. 예정. 예지. 자유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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