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사전등록   히,헬 폰트받기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5-14
 제목  문화혁명
 주제어  [문화혁명] [중국]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중국에서 일어났던 공산주의 정치운동(1966-1969)으로 대약진운동 실패로 권력의 기반이 흔들릴 것을 우려한 마오쩌둥의 주도로 1965년 가을부터 약 10여 년 동안 중국 사회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 대규모 군중 운동이다.

모택동을 중심한 교조적 공산주의자들이 벌인 개혁운동으로 수정주의 노선 및 자본주의 세력 제거에 목적을 두고 청소년으로 조직된 홍위병들이 도구로 이용되었다.

한편 기독교가 '브로조아 문화'로 인식되어 수많은 교회당이 파괴되었고 기독교 관계 서적들이 소각되었으며 다수의 성직자와 신도들이 희생되었다.

 

 

[문화혁명의 발발원인]

1965년 11월 10일 상해 의 급진적 문예비평가인 요문원은 신편 역사극<해서파관>을 평함이란 글을 상해에서 발간되는 '문회보'에 발표하고 모택동의 대약진운동 노선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오함과 오함의 지원세력을 격렬하게 비난함으로써 문화혁명의 첫 포문을 열었다.

이와 같이 지식인 사회와 당 일부에서 확산되는 '수정주의적 사상'을 비판한 요문원의 문제제기에 대하여 유소기와 등소평 그리고 팽진의 영양하에 있었던 중앙당 선전부와 북경시당위원회, 그리고 팽진을 조정으로 한 문화혁명 5인 소조는 요문원의 글이 《인민일보》등 중앙지에 게재되는 것을 억제하면서 가급적 학술적 차원에서 축소 처리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모택동은 팽진과 북경시당위원회, 당선전부의 오류를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이들의 해임과 개편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모택동은 1966년 5월에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문화혁명의 강령적 문건인 5·16통치를 통과시키고, 진백달, 강청, 장춘교 등 좌파인물풍속, 구관습의 타파와 신사상, 신문화, 신풍속, 신관습을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문화대혁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 내외에서 모택동과 좌파의 문화대혁명에 대하여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 있었다. 특히, 유소기와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당내 실권파들은 각지에 공작조를 파견, 문화대혁명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당내 실권파의 소극적 방해에 직면하자 모택동은 조반유리의 기치를 내걸고 청년과 학생, 그리고 노동자들로 구성된 홍위병을 동원하여 당 관료들의 저항을 분쇄하려고 하였다. 특히, 1966년 8월에는 사령부를 포격한다 : 나의 대자보를 공포하고 홍위병들로 하여금 당내 실권파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모택동은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일부 지도자는 반동 부르주아계급의 입장에 서서 부르주아 독재를 실행하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질풍노도와 같은 문화대혁명을 탄압하고 있다. 고 비난하면서 이들에 대한 혁명적 대 비판을 전개하고, 이들이 장악하고 있는 당을 접수하는 탈권운동을 감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모택동과 좌파들의 주도하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8기 11중전회에서는 문화혁명의 목표와 성격을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교육을 개혁하고, 문예를 개혁하고, 사회주의의 경제적 기초에 맞지 안는 모든 상부구조를 개혁하는 것 이라고 선언하였다. 즉, 문화혁명의 목표는 실권파의 타도와 상부구조의 개혁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각양각색의 홍위병들이 조직 동원되어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에 대한 파괴운동이 전개되었고, 각급 수준에서 실권하와 부르주아 대표자들에 대한 조반과 탈원운동이 단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과 국가기관의 기능은 마비되었고, 유소기와 등소평과 같은 대표적인 실권파들은 홍위병들에 의하여 굴욕적인 학대를 받고 숙청 당했다. 상해와 같은 곳에서는 장춘교의 지휘하에 기존의 당과 국가기구를 타도하고 파리 코뮨의 이상에 따라서 새로운 국가기구를 건설하려는 시도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좌파의 공격과 탈원운동에 대한 반발과 저항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각급 수준에서 구관료와 간부들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홍위병을 조직하거나 지방군의 지원을 받아 좌파의 공격에 대항했으며, 이해관계와 이념적 성행이 대립되는 각종 홍위병과 대중단체를 간의 갈등과 충돌이 확산, 심화됨으로써 중국은 순식간에 천하대란의 상태로 전락하였다.

이처럼 문화혁명으로 중국사회의 균열과 갈등이 증폭되고 극심한 혼란이 초래되자 모택동은 1967년 군부개입을 지시하였고, 군부 주도하에 이른바 3결합의 원칙, 즉 혁명적 간부와 대중단체 대표, 그리고 군 대표로 구성된 혁명위원회에 기초하여 당과 국가기구를 재건할 것을 지시하였다. 군부 주도하의 당과 국가기구의 재건이 강조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각급 수준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급성장하였다. 특히, 임표를 중심으로 한 군부의 영향력은 모택동의 지도력에까지 도전할 수 있을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따라서 모택동은 1971년 주은래의 지원을 받아, 임표세력을 숙청하고 당과 국가의 재건과 정상화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1973년에 등소평을 비롯한 일부 구간부들의 복권을 허용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문화대혁명으로 야기된 혼란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은 여전히 문화대혁명의 기본노선과 정책을 옹호하였으며, 강청, 장춘교, 요문원, 완홍문 등 문화혁명 4인방을 등용함으로써 세력균형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모택동이 사망할 때까지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주은래와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실용주의파와 문혁 4인방의 좌파노선 간의 권력투쟁과 정책논쟁, 그리고 노선투쟁이 계속되었다. 중앙지도부의 분열은 각급 지방수준에까지 확산됨으로써,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현저하게 약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당과 국가의 기능을 마비시킴으로써 중국사회에 대한 당 국가의 영향력을 저하시키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현대 중국 정치론 변화와 개혁의 중국정치- 46p~49p 서진영 나남 출판

 

>> 목차고리 : 세계 > 아시아 > 동아시아 > 중국

 



   


A-Z




  인기검색어
kcm  307908
설교  162654
교회  117286
아시아  93537
선교  89757
세계  79429
예수  77304
선교회  67740
바울  63605
사랑  62867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