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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3-02
 제목  최근의 바리새인 연구
 주제어  바리새인 바리세파
 자료출처  신영교회  성경본문  
 내용

"최근의 역사적 바리새인 연구"  신약성서와 유대교 세미나, 권종선 교수님 지도

문제 제기

바리새인들은 두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첫째, 복음서들은 그들을 예수에 대한 주된 반대 집단으로 묘사한다. 둘째, 우리가 알고 있듯이 (랍비적) 유대주의는 바리새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두 가지 이유에는 서로 상반된 전제를 함축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약성서의 독자들은 서기관, 바리새인, 그리고 사두개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될 수 있는 데, 왜냐하면 신약성서가 이 집단들에 대한 균형있게 묘사를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신약성서를 무비판적으로 이해하는데서 오는 몇 가지 공통적인 오해가 있다. 첫째, 바리새인들은 모두가 위선자들이다; 둘째, 바리새인들은 예수 시대에 팔레스틴에서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했다. 셋째, 바리새인이 예수의 죽음 초래했다.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에서 예수에 반대하는 바리새인을 두고 일부 학자들은 평면적 인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특히 개신교인들은 로마 가톨릭의 형식주의를 비난하는 한 방식으로서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legalism)을 비판적으로 강조한다. 가톨릭인들은 바리새인을 위선자로 말하는 복음서의 기록에 관심을 두고 있다.
바리새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해에 제동을 가하는 경향도 있다. 그 한 예를 들면, 노이스너(Jacob Neusner)가 1970년 이전에 바리새인에 대해 기록된 모든 것은 개정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리새인에 대한 오해가 편만함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을 지혜와 학식의 근원으로 칭송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종교적 전통을 바리새인들에게로 소급하기 때문이다. 또한 샌더스는 "언약적 규범주의"를 주장하면서 바리새인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비판하고, 개념의 전이를 시도한다.

바리새인 연구 동향

지난 세기에 바리새인에 대한 연구들은 많은 정치적 및 방법론적 문제들을 중심으로 골치를 앓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프로그램에 대한 유대적 해석들은 전통적 그리고 진보적인 유대인들간의 현대적 갈등에 의해서 암암리 영향을 받아 왔다. 바리새인에 대한 많은 기독교인들의 기록들은 신약성서의 반-유대적 변증의 무비판적 수용이나 현대의 반-셈족주의에 의해서 그 가치가 하락되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 학자들에 의한 바리새인에 대한 변증적 변호는 바리새인을 왜곡시키거나 낭만적으로 만들었고, 또한 그들을 그들의 역사적 상황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최근의 유대교 학계는 "역사적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중심으로 활발한 논의를 진행한다. 이 분야에 공헌을 남기고 있는 주요 학자들은 노이스너(J. Neusner), 리프킨(E. Rivkin), 살다리니(A. J. Saldarini), 그리고 마슨(Mason) 등이다. 예를 들면 노이스너는 랍비 문헌에 대한 비판적 고찰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다. 리프킨은 바리새인을 정의하는데 사용될 자료의 범위를 정했다. 살다리니는 1세기 "분파/종파"를 연구하는데 사회 과학적 모델을 소개했다. 마슨은 바리새인을 다루는 요세푸스의 모든 문헌을 문학적으로 연구했다.
하지만 최근 20년간의 연구 결과중 한가지 분명한 것은 바리새인에 관하여 이전의 세대보다 더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질문들이 던져지고 있다: 자료의 신뢰성, 바리새인의 기원과 그 역사, 그들의 가르침, 그리고 랍비적 유대주의를 포함하여 당대의 집단들과의 관계. 이러한 질문들의 복잡성 때문에 서로 다르고 모순되는 답변들이 제시되었다. 이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와 이론들을 간략하게 검토하겠다.

가이어(A. Geiger)

가이거의 바리새인에 대한 연구 결과는 19, 20세기의 논쟁의 토대를 놓았다. 그는 힐렐학파를 보다 보수적이고 문자적인 사두개파 및 바리새적인 샴마이학파보다는 환경에 대해 더 자유적이고 적응적이라고 해석했다. 옛 할라카의 엄격성과 바리새인의 새로운 할라카간의 대조는 19세기 독일에서 전통적 유대주의와 개혁적 유대주의간의 갈등을 평행시켰다.
Wlelhausen, Sch rer, Bousset, Meyer
이 네 사람은 예언적 윤리에 대조하여 "후기" 유대주의를 초기 유대주의의 형식적 퇴보로 해석했다. 벨하우젠과 19세기 작가들은 헹겔 철학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고, 또한 진화적 사고는 바리새인을 형식적 그리고 물질적 유대주의의 징조로 간주했다. 이러한 유대주의는 타락하여 기독교에 의해서 대체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금세기 초의 유대인 학자들

많은 유대인 학자들은 바리새인에 대한 기독교인 학자들의 해석에 반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금세기 초에 영국과 미국의 학계는 J. Lauterbach(진보적인 평신도 지도자들로서 바리새인), L. Ginzberg(가이거의 견해와 유사), L. Finkelstein(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계층과 위치를 연구), L. Baeck(종교적 지배를 추구한 운동), H. Loewe 등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학자들은 자료들의 가치를 인정했지만, 모순적이거나 개연성이 없을 때에는 비판적으로 고찰하기도 했다.

R. T. Herford
헤르포드는 기독교적 변증과 반-셈족주의를 중화시키는 일련의 저서들을 발간했다. 그는 랍비적 문헌에 기초하여 바리새인을 구전 율법에 대한 교사로 묘사했다.

G. F. Moore
처음 두 세기 동안의 유대적 사상에 대한 능란하고 분별력있는 종합, 즉 "규범적 유대주의"(normative Judaism)라는 무어의 연구는 영어권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무어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간의 신학적 불일치를 강조했다.

S. Zeitlin
자이틀린은 랍비 문헌에서 "바리새인" 용어의 다양한 의미를 구분했는데, 그 의도는 사두개인에 대립되는 역사적 집단이 바리새인이 아닌 "분리자들"의 다른 집단과 구분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바리새인의 기원을 주전 5세기에 두었고, 종파가 아니라 구전 율법에 초점을 둔 평신도 서기관 운동에서 기인한 것으로 말한다. 물론 그가 비판적으로 자료들을 사용하지만, 그의 방법론은 특이하기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Ellis Rivkin
리프킨의 바리새인 연구의 핵심은 "Defining the Pharisees: The Tannaitic Sources"에 있는데, 그는 이 자료에 있는 "perushim"을 바리새인과 동일시 하면서 바리새인의 모습을 구축하려 한다. 리프킨은, 자이틀린의 바리새인에 대한 견해를 다소 수정하여, 바리새인을 종파나 운동이 아니라 이중적 율법―구전 율법과 기록된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한 학자 계층으로 말한다. 하지만 리프킨은 무비판적으로 자료들의 역사성을 신뢰하면서, 시대착오적으로 자료들을 연결시켰다. 예를 들면, 이중적 율법의 구분은 야브네에서 유대주의 재건의 특징이다.
리프킨의 근거없는 역사적 진술들은 노이스너와 라이트스톤(Jack Lightstone)에 의해 비판받았다. 라이트스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논쟁을 보이는 텍스트를 연구하고서, 이중적 율법을 찾아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바움가텐(Joseph Baumgarten)은 동일한 본문을 연구한 후, Tannaitic 본문이 바리새인에 대한 적절한 묘사를 제시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리프킨은 요세푸스의 문헌과 신약성서를 고찰함으로 자신의 이전의 논제를 계속하여 주장했다. 요세푸스의 자료에 대한 리프킨의 평가는 코헨에 의해서 심한 비판을 받았다.
리프킨에 대한 두 결론은 이렇다: 첫째, 그는 요세푸스와 Tannaitics의 자료를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단순하게 취급했다. 둘째, 리프킨은 요세푸스의 바리새인에 호감을 갖는다. 리프킨의 접근은 지적인 경제와 정밀함으로 특징된다. 하지만 증거의 복잡성이 직면했을 때, 이러한 장점들은 오히려 단점이 된다. 따라서 랍비 문헌에 대한 이해는 다소 전문적이지 못하다.

Jacob Neusner
노이스너의 유대교 연구는 그의 멘토인 스미쓰(Morton Smith)의 저서에 기초한 것으로 특정 주제들에 대한 견해를 수정한다는 평을 받는다. 따라서 노이스너에 대한 평가는 스키쓰/노이스너의 제안과 노이스너 제안으로 나누어서 진행되어야 한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연구 방법론에서 고찰하기로 하고, 다만 랍비적 문헌들에 대한 엄밀한 역사-비판적 분석의 결과를 언급한다. 제 2 성전기의 현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신뢰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그들의 가르침은 1, 2세기의 것으로 수용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자와 시대의 검증을 받은 자료들은 더 신뢰성을 갖게 되었다. 그의 방법론에 의해서 바리새인의 가르침에 대한 개연적 결론을 얻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요세푸스와 신약 성서의 증거와 관련을 맺게 했다. 예를 들면, 의식적 정결, 십일조와 다른 음식법, 안식일과 축제일 준수 등이다. 노이스너는 바리새인이 하즈모니안 치하에서는 정치적 당파였지만, 헤롯에 의해서 그 자리를 박탈 당했다고 주장할 뿐아니라 또한 바리새인들이 성전 제의나 지배 세력의 통제 아래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은 정치적 관심을 지닌 집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이스너의 바리새적 전통과 랍비적 구전 율법간의 구분, 그리고 야브네에서 발생한 변화의 중요성을 이해하려는 코헨(S. J. D. Cohen)의 시도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70년-이전의 바리새인의 모습은 어떻했는가? 요세푸스의 바리새인에 대한 묘사는 복잡하지만, 후기 작품에서 바리새인에 대한 호의적 태도는 스미쓰/노이스너의 제안으로 설명되지 못한다. 그 두 학자는 70년-이전의 바리새인에 대한 상대적 비중요성을 과도하게 진술했다. 4QMMT는 쿰란 공동체와 공식적 유대주의간의 차이점에 대한 목록이다. 공식적 유대주의를 특징짓는 율법의 요점들은 랍비의 할라카에도 나오고 랍비적 전승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바리새인에게로 소급된다. 그러나 이러한 요점들은 공식적인 유대주의의 것들이다. 그렇다면 쿰란 공동체의 시각에는 공식적 유대주의와 바리새주의는 다소 동일하게 보였다는 것인가?

노이스너는 바리새주의에서 변화에 대한 기록을 힐렐에게로 돌린다. 힐렐에 관한 랍비적 전승들은 그 사람에 대해서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바리새인에 관한 랍비적 전승을 요약한 노이스너는 그 집단이 전적으로 내적인 모습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헤롯 왕조 시대에 바리새주의는 비정치적 운동이었다고 노이스너는 결론 짓는다. 그 집단의 이러한 모습은 공관복음서의 증거와 일치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요세푸스의 바리새인들은 정치적 운동이었다. 이러한 차이를 노이스너는 집단의 특성상의 변화로 설명한다: 정치당으로 시작하여 조만간에 식탁 교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 변화의 책임 소재는 어디에 있는가? 노이스너는 힐렐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 힐렐에 대한 자료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노이스너의 방법론은 타당치 않다는 비판을 받는다.

노이스너(Jacob Neusner)와 리프킨(Ellis Rivkin)이 제시한 역사적 바리새인(historical Pharisees)에 대한 연구는 요세푸스와 신약 성서의 해석과 더불어 랍비 문헌에 대한 복잡한 접근을 제시했다. 리프킨이 바리새인을 말하는 텍스트를 주된 집단으로 사용하면서 랍비 문헌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통제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는 그 주된 집단을 다른 자료들과 기간들에 해당하는 랍비 텍스트를 해석하는데 사용한다. 게다가, 그는 바리새인을 확립된 권위에서 유대주의를 지배하려는 학자들 그리고 유대주의의 국제적 형태 형성자로 잘못 생각한다. 미쉬나와 70년-이전의 현인들에 관한 기록에 대한 노이스너의 해석은 역사 비평적이다. 바리새인에 대한 그의 관심의 주제에 대한 그의 설명은 근본적이지만, 바리새인을 비정치적 집단으로 특징짓는 것은 어떻게 종교가 1세기에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국면의 일부인지에 대한 오해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작품이 많이 사용되지만, 다른 사회적 상황이 제시될 것이다.

J. Bowker와 H. Mantel
보우커는 율법을 매일의 삶에 적절하게 만들고 제사장의 거룩을 백성들에게까지 확대하려고 한 현자들의 운동에 대한 경멸적인 용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히르카누스에 의해서 산헤드린에서 추방되었을 때 종파(sect)가 되었고, 성전 멸망 후에 유대주의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의 자료 활용은 인위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맨텔은 랍비적 문헌을 역사적으로 정확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모순이 되는 경우엔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사용한다. 그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분리가 에스라 시대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또한 바리새인을 토라에 대한 학자적 연구의 운동을 말한다.

바리새인 재평가

던은 바리새인 재평가로 특징되는 바리새인 연구의 요점을 제시한다:

첫째, 예수 시대의 바리새인은 복음서, 특히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70년-이후 기독교와 유대주의간의 대립을 반영하면서 그릇되게 제시되었다. 이러한 판단은 유대인 학계 뿐 아니라 신약학계에서도 거의 지지받고 있다.

둘째, 유대인 학자들은 바리새인이 예수의 죽음에 책임을 없을 뿐 아니라 그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H. Maccoby, "the Jewish view of Jesus").

셋째,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적대적이기 않았을 것이다. 예수도 한 바리새인이었다.
샌더스는 [예수와 유대교]에서 이상의 요점들, 특히 세 번째를 상세히 다룸으로 재평가의 분수령을 세운다. 샌더스는 예수와 바리새인간의 본질적인 불일치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바리새인들은 일반인들을 죄인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그들과 식사를 나누는 예수를 비난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유대교의 사회적 및 종교적 생활에서 배제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연구의 범위

바리새인 연구사를 개관함에서 얻은 것은 문헌들에 대한 비판적 고찰의 필요성이다. 그리고 바리새인의 조직, 사회적 형태, 프로그램, 그리고 목적 등이 바리새인 연구의 주제들이라는 점이다. 이제 바리새인에 관한 이론들은 적절한 문헌 고찰을 토대로 제시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특히 바리새인의 내적 행위들과 사회에서 그들의 사회적 역할이 1세기 유대주의의 다양성과 로마 제국의 사회적 구조안에서 밝혀져야 한다.
바리새인 연구에 사용되는 문헌은 세 가지 부류다―요세푸스의 문헌들, 신약성서, 그리고 랍비 문헌들. 역사적 재구축을 시도함에서 있어서 이러한 자료들이 갖고 있는 특성과 문제들에 대해서 염두할 필요가 있다. 우선적으로 자료들의 객관성을 말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요세푸스는 자신이 한 바리새인이라고 주장하고, 신약성서는 바리새인을 예수의 반대자로 간주하고, 그리고 랍비들은 바리새인을 그들의 선조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각의 자료는 비평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자료에 대한 비판적 고찰들, 즉 자료의 목적, 연대, 그리고 특성 등에 대한 고찰이 요구된다. 특히 바리새인을 직접 언급하는 단편적 자료들만이 고찰의 대상임을 기억해야 한다.
연구자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1세기 팔레스틴의 사회 속에서 바리새인에 대한 이해에 있기 때문에, 본 연구의 시대적 범위를 원칙상 헤롯 왕조에서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 국한하고자 한다. 이러한 제한으로 바리새인의 기원은 범위 밖으로 밀려난다. 또한 연구에서 고찰하게 될 요세푸스의 자료는 [유대인 전쟁사], [유대인 고대사], 그리고 [생애] 중에서 바리새인을 언급한 부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서는 팔레스틴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이야기, 즉 복음서에 국한하기로 한다. 또한 랍비 문헌은 70년 이전의 바리새인에 대한 기술을 제시한 부분에 국한하기로 한다.
본고에서 중심적으로 다룰 주제는 최근의 학계에서 중심적으로 논의되는 바리새인을 증거한 자료에 대한 검토와 분석 및 그 신뢰성, 바리새인의 가르침 혹은 신학, 그리고 유대교 안에서 유대주의 체제와 다른 체제와의 기능적 관계 등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리새인의 기원과 역사는 제외하기로 하지만, 다른 주제를 다룰 때 간접적으로 반영될 것이다. 발표자는 언급한 주제별로가 아니라 이해의 밥법론에 따라 제시할 것이다.

연구 방법론

우리가 문헌을 중심으로 바리새인을 고찰할 때, 집단으로서 바리새인을 연구할 경우가 있겠고 또한 개인으로서 바리새인을 연구할 경우가 있다. 이렇게 구분되는 바리새인의 경우를 동일한 모델로 고찰하는 것보다는 상이한 방법을 통해 고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것으로 판단됨으로 여러 해석적 모델 중에서 연구자가 고찰하기로 정한 주제들에 적절한 방법론을 간략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역사-비판적 방법론

노이스너는 [정치에서 신앙으로](From Politics to Piety)에서 가능한 자료에 근거하여 역사적 바리새인을 구축하는 복잡한 문제를 다룬다. "삼각 구도"라 불릴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하여 그는 자료들의 특성을 파악학 후, 자료들의 일치와 불일치를 비교했다. 그리고 의도적인고 우연적인 왜곡들을 수정했다.
스미쓰와 노이스너는 요세푸스 문헌에 대한 비평적 이해를 제안한다. 요세푸스는 자신의 [생애]에서 바리새인에 관하여 호의적인 진술을 한다. 상황은 거의 동시에 기록된 [유대인 고대사]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이전의 작품인 [유대인 전쟁사]에서는 덜 호의적이다. 그들은 이러한 차이를 바리새인의 변화하는 정치적 운명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후기의 저서에서 더 호의적인 진술은 야브네에서 R. 가말리엘 II의 정치적 상승에 의해서 고무된다. 바리새인의 대중성과 영향력에 대한 [유대인 고대사]와 [생애]의 증거는 실제적 규모로 축소된다. 70년 이전의 바리새인의 영향력은 상당히 감소된다.

우리는 노이스너가 세 개의 독립된 자료집들을 역사-비판적으로 분석한 것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첫째, 유대인으로서 로마의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75-100년 동안 활동하면서 저술한 역사적 이야기(historical narratives)가 있다. 그는 유대인들의 역사를 시작부터 예루살렘 멸망까지 기록했다. 따라서 그의 역사적 기록은 70년 후 로마 정치에서 그의 입장의 견지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둘째, 기독교인 공동체가 50-90년간에 기록한 예수에 관한 전기적 전승(biographical traditions)과 말씀들(sayings)이다. 변증적이고 서사적인 이 기록은 바리새인에 세심한 관심을 쏟지 않는다. 이 기록에서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강조하고, 성전 밖에서 정결법 준수에 헌신한다.
셋째, 바리새인의 후계자들로 간주되는 1세기 후반과 2세기의 랍비들에 의해서 70년 이전의 바리새인들에게로 돌려지는 율법들과 말씀들에 대한 복잡한 기록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료들은 역사적 바리새인의 상황, 관심, 그리고 관점이 아니라 화자의 것들을 반영할 뿐이다.
슈바츠(Daniel Schwartz)는 [유대인 고대사]에는 바리새인이 유대전쟁에 대한 실패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고 주장하면서 스미쓰/노이스너를 비판한다. 슈바츠의 제안은 요세푸스의 의도가 바리새인을 비정치적이고 반로마 전쟁에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미쓰/노이스너의 가설은 굳블라트(David Goodblatt)에 의해서 변호되었는데, 그는 [고대사]에서 바리새인에 대한 적대적 묘사를 인정하면서도 바리새인에 관한 요세푸스의 증거는 스미쓰나 노이스너가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복잡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결론은 오히려 스미쓰/노이스너의 출발점을 손상시킨다. 그렇다면 70년 이전에 바리새인은 더 현저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은 단순하게 랍비와 동일시 될 수 없다. 랍비 문헌을 통해서 바리새인의 모습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수정되어야 한다.

인물 연구 방법론(prosopographical investigation)

"역사적 바리새인"(historical Pharisees)에 대한 재현의 한 방법론에는 자신들을 바리새인으로 동일시하거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바리새인으로 동일시되는 사람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 수효는 소수, 4세기 이전으로 확인된 자료에서는 단지 12명에 불과하다. 그 바리새인들을 비-조직적인 집단이 아니라 동일한 집단의 구성원이 된 개인들로 다루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우리는 바리새인에 관한 최근 이론들의 입증(verification) 혹은 허위(falsification)에 대한 단서들을 발견할 것이다. 이 제한된 연구는 바리새인의 정체, 그들의 지지 대상, 후기 랍비적 유대주의와의 관계 등에 대한 질문에 유용한 긍정적 결과뿐 아니라 부정적 결과를 제공할 것이다.
한 부정적 결과는 노이스너에 의해서 연구된 현인들(sages) 중에 단지 세 혹은 네 명만이 현재의 연구에 적절하다는 평을 받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고대 자료에서 바리새인으로 동일시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히 바리새인 집단과 동일시된 개인들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방법은 바리새인에 관한 확언을 위한 보다 안전한 기초를 제공할 것이다. 또한 이 방법은 호의적이든 비호의적인든 간에 그 집단에 대한 진부한 견해를 의문시 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학적 모델: 바리새인의 정체성 확인을 위한 질문들.

요세푸스가 제시한 세 철학파―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중에 바리새인에 대한 다양한 묘사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의 것들이다: 유대주의의 한 종파, 강력한 종교 지도자 집단, 정치적 지도자 집단, 학식 있는 학자 집단, 제사장과 경쟁하는 평신도 운동, 도시 자영업의 중산층, 혹은 이러한 것들의 혼합. 일반적으로 바리새인에 대한 이해는 예루살렘의 정치 세력과 신앙 생활에 관련되고, 그리고 도서관의 기록물을 남기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바리새인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 토대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찰에 요구된다. 단지 그들의 신념체계에 기초할 것인지, 아니면 그것과 연관되어 있는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요소들과 관심사에 기초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들의 사회적 정체를 이해하기 위한 여러 질문들이 있을 수 있다:

바리새인은 어느 사회 계층에서 기원했는가; 유대인 사회에서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회적 신분을 누렸는가; 다른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어떤 정치적 경험을 하였는가; 백성들과 다른 지도자 집단에 어떤 권위와 영향력을 발휘했는가; 유대인 사회에서 어느 정도로 중요했는가; 어느 정도로 직접적인 정치력 영향력을 발휘했는가; 자신들과 유대인 사회를 향한 그들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유대인 사회를 위하여 어떤 프로그램을 제시했는가?
위에 언급된 질문들은 다음과 같은 내적인 면에 대한 단서를 제시할 수 있다:
어느 정도의 구성원으로 어떤 조직을 지녔는가; 회원은 어떻게 정의되었는가; 어떤 신념, 사상, 그리고 규칙이 공동

 

생활을 지배했는가?

문학적 및 역사적 분석과 관련된 사회학적 방법론의 활용은 적절한 상황에 증거에 대한 체계적이고 지배적이 이해를 제공할 것이다.

용어 정의

연구에 필요한 일부의 용어들에 국한하여 정의하고자 한다. 특히 사회학적 용어들과 유대주의 연구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들을 제시한다.

유대교(Judai는)와 유대주의(Judaism)

일반적으로 "유대교"라고 불리는 용어는 하부의 모든 다양성을 포함한 총체적 종교를 언급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최근에 일부 학자들은 "Judaism"을 독립적인 유대인의 종교 체제를 의미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그래서 하나 이상의 체제를 말할 때는 "Judaisms"이라 한다. 따라서 연구자는 총체적인 유대인의 종교 체제들을 부를 때는 유대교(Judaisms)라 하고, 특정의 한 종교 체제를 말할 때는 "유대주의"(Judaism)이라고 부를 것이다.

"종파"
요세푸스는 헬라어 사용 독자의 이해를 위하여 "sect/hairesis"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팔레스틴의 유대인 사회를 세 학파(school)로 구분한다: 사두개인, 바리새인, 그리고 에세네파. 이 용어에 대한 코헨 교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종파"를 좀더 큰 종교적 집단으로부터 이탈하고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때문에 좀더 큰 집단의 이상을 자신들만이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소규모의 조직된 집단으로 정의한다. 종파의 수준을 넘게되면 독립된 종교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부류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종파에서 성장한 기독교와 바리새 종파에서 성장한 랍비 유대교다.

"바리새인" 그리고 "바리새주의"(Pharisaism)
반-유대적 기독교 신학의 관점의 관점에 반대하여 노이스너는 힐렐의 경구를 들어 바리새인에 대한 개념을 전환시킨다: "당신에게 혐오스런 것을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그것이 토라의 전부다. 나머지 모든 것은 주석이다. 자, 가서 배우라." 그리고 "만일 내가 내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할 것인가? 그러나 내가 내 자신을 위할 때,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그렇다면 바리새인은 위선자, 형식주의자 혹은 자기-의 사람이 아니다. M. 스미쓰는 바리새주의를 고대 문명의 관점에서 바리새주의는 유대교 철학안에서 한 분파라고 한다.

사회학적 분석을 통한 역사적 바리새인 이해

앞서 언급하였듯이, 바리새인에 대한 문헌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 요세푸스의 문헌; 둘째, 신약성서의 기록; 셋째, 랍비 문헌. 이러한 자료들이 야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인식이 바리새인에 대한 역사적 재구축보다 선행하다. 따라서 이러한 문헌들을 다루는 방법에 공헌한 학자들의 조언에 귀기울여야 한다. 스미쓰(M. Smith)는 요세푸스 문헌을 다루는 단서를 제공하고, 쿡(M. J. Cook)은 예수 시대에 유대주의의 다양성에 관한 복음서들의 증거의 타당성에 관한 흥미로운 논증을 제시했다. 비슷하게 노이스너(J. Neusner)는 랍비 문헌을 연구하는 길을 제시했다. 이제 이 문헌들을 차례대로 고찰하고자 한다.

요세푸스의 바리새인

로마에서 기록된 요세푸스의 네 작품들은 고대로부터 전수되어 왔다: [유대인 전쟁사], [유대인 고대사][생애], 그리고 [아피온에 대항하여]. [유대인 전쟁사]는 처음에 아람어로 기록되었는데, 그 목적은 파르티아 제국(Parthian Empire)의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의 함락을 두고 로마를 비난하지 않도록 호소하려는 것이었다. 요세푸스는 그 결과가 유대인 자신의 그릇된 행위의 결과로 주장한다. 또한 그의 의도는 로마인들의 팔레스틴 행정과 전쟁 행위를 방어하려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후에 헬라어로 번역되어 A.D. 75년과 79년간에 발행되었다. 그로부터 16년 후인 A.D. 93-94에 그는 A.D. 70년에 이르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다루는 [유대인 고대사]를 발행했다. A.D. 100년 후에 [생애]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피온에 대항하여]를 썼다. 요세푸스의 문헌에는 "바리새인"이 20회 정도 언급되는데, 그러한 언급은 유대인 사회에서 소극적 역할을 반영한다.

헤롯이 죽고 그의 아들 아르켈라오가 통치를 시작하기 전에, 팔레스틴 사람들은 반로마 운동으로 그 지역의 무질서를 야기시켰는데, 이것은 주로 다양한 정치적이고 메시아적 유대인들에 의해서 지시되었다. 아르칼레오의 폭정으로 유대인들과 사마리안들은 그를 제거할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그 지역은 6CE-66 동안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첫 총독인 코포니우스의 치하에서 갈릴리 사람 유다는 로마에 세금을 거부하면서 오직 하나님 만의 통치를 주장했다. 그의 반로마운동이 특이한 점은 그가 넷째 철학파의 교사이고 창시자라는 점이다. 그는 바리새인 사독의 도움을 받아서 백성들도 반로마운동에 동참케 했다. 요세푸스는 이 사건을 들어 혁신과 개혁은 위험한 것이고, 또한 유대인의 정치를 파괴하는 것임을 경고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운동은 유대주의 세 학파와는 공통점이 없다고 덧붙인다. 그렇지만 관련은 있다고 제시한 듯하다.

[유대인 전쟁사]의 바리새인

바리새인은 [유대인 전쟁사]의 세 주요 구절에 나온다. 바리새인들은 알렉산드리아 살로메의 통치 때에 갑자스럽게 지배적 새력으로 등장한다. 후에 그들은 헤롯의 궁정의 일과 과련하여 언급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리새인들은 중요한 관심을 받는다.
바리새인과 알렉산드라 살로메 (1권, 107-114): 바리새인들은 종교와 율법을 가르치는 분야에서 "탁월하기" 제시된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친 신앙의 내용이나 율법의 내용은 묘사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은 왕비의 신앙을 강조하고, 그녀의 신뢰를 이용하고, 점차적으로 권력을 잡는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 권력을 사용한다. 그들은 반대자들을 숙청하는 과오를 범한다.
헤롯의 궁정에서 (1권, 571): 바리새인들은 다른 정치 당파처럼 한 당파를 지지하고 다른 당파를 반대하도록 매수되었다.
철학파 (2권, 162-166) :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에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리고 에세네파를 순서대로 다루는데, 에세네파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다루는 이유는 그들의 생활 양식이 정치적 위협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로마인들과 동양 철학자들로 하여금 알도록 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세 철학파의 철학적 및 신학적 논제에 대한 신념들인 운명(신의 섭리), 자유 의지와 인간의 책임, 상벌을 동반한 불멸 등의 대조된다. 그리고 그들 안에서 상호 관련성 및 다른 학파들과의 관련성이 대조된다.

여기서 요세푸스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을 칭찬하거나 비난하지는 않는다. 요세푸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신학적 그리고 철학적 차이를 밝히지만, 그들의 입장에 대한 논평을 하지는 않는다. 바리새인들은 내적인 사회적 관계와 공적으로 조화로운 관계를 육성한다. 요세푸스는 신념과 관련하여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행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유대인 고대사]의 바리새인

이 책에서 바리새인은 매우 지배적이다. 이제 요세푸스가 말하려는 것은 바리새인의 도움 없이는 국가가 통치될 수 없다는 것이고, 자신도 그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유대인 고대사], 13권: [고대사], 13권에서 처음으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리고 에세네파가 소개되는데, 그 목적은 헬라 세계에서 유대주의의 지위를 확립하려는 것이다.
[고대사], 18권: 요세푸스는 집단과 철학파로서 바리새인의 신념과 행위를 자세하게 제시한다.

요세푸스는 행위에 근거하여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을 칭찬하거나 책망하지 않고, 단지 그들의 세력과 영향력을 언급한다. 그의 의도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사고 방식이 헬라 철학만큼 존중될 수 있고 혁신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보이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70년 이후의 상황을 고려하여 바리새인에 대해 요세푸스가 과장을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생애]
자신의 인격에 대한 공격의 답변으로 그리고 [고대사]의 부록으로 기록된 [생애]에서, 요세푸스는 몇 집단에서의 3년간의 훈련과 19살 때 스토아학파와 유사점을 가진 바누스의 제자가 되기로 선택한 것에 대해 말한다. 일반적으로 바리새인은 12개월간의 훈련을 요구했고, 사두개인에 대한 정보는 없고, 그리고 에세네파는 긴 견습 기간을 부과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자면, 요세푸스가 바리새주의, 에세네주의, 그리고 사두개주의를 연구하기 위하여 상당한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종파와 자신의 삶에 대한 요세푸스의 증거는 서로 관련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가 말하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과 자신이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코헨은 요세푸스가 자신을 바리새인과의 동일시한 것이 적절하다고 평가한다. 라작(Rajak)은 바누스가 광야에서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집단을 인도했을 것이라고 명시한다. 그렇다면 요세푸스가 바리새인을 선택한 것은 혁명에 대한 반대였을 것이고 제국과의 조정을 수용한 것이다.
하지만 노이스너는 요세푸스의 이야기를 토대로 바리새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추정한다:
일부 바리새인들은 중요한 정치가로서 전쟁을 지휘하거나 전장터의 지휘관을 세우거나 제거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고위직을 누렸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정치적 경험과 상당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요약
이상 고찰한 내용을 요약하겠다. 요세푸스는 팔레스틴의 지배력의 전환에 따라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세력과 영향력을 위한 정치적 및 사회적 경쟁의 부분으로 다룬다. 바리새인들은 정치적 관심을 가진 집단이었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들은 조직된 자유 집단으로서 세력 확보에 집요한 관심을 보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렌스키가 말하는 가신 집단이었다.
바리새인들이 사회와 율법에 대해서 원하는 정확한 목적을 요세푸스는 서술하지 않는다. 하스몬니안 시대로부터 아르칼레오의 통치 시기까지 그들은 전통적이었고, 비혁명적 유대주의였다. 어떤 종류의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지라도, 그들은 강력한 후견인의 도움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그리고 상위 계층의 다른 집단들과 제휴했다.
요세푸스는 사두개인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지배 계층의 일원이었다. 사두개인들이 촉진시킨 성서적 전통과 해석들은 지위와 지배 계층의 정치적 및 재정적 이익을 육성시켰다. 이것은 그들의 지지와 비대중성을 설명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 대한 요세푸스의 기술은 그들의 행동과 일치하지만, 결코 완전하지 않고 그들의 사상과 조직에 대해 일관적인 서술을 하지 않는다.

요세푸스의 문헌에 대한 평가

바리새인은 대중의 신뢰와 지지를 받으면서 대중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대규모 집단이라고 일반적으로 가정된다(Rivkin; Davies; Finkel; Jeremias; Meyer; Marcus). 하지만 스미쓰(Smith)는 [유대 전쟁사]와 [유대 고대사]에서 요세푸스의 바리새인에 대한 묘사를 비교 분석하여, 결과적으로 그의 증거의 가치에 의심을 제시했다. 그의 논평은 우리가 요세푸스의 두 작품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차이점들을 얼버무릴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만든다.
ai[resij: 종파 혹은 학파
요세푸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내적 조직과 지도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또한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지도 않다. 그 한 예가 바로 특정 학파의 사상을 의미하는 "ai[resij"다. 요세푸스는 이 용어를 유대주의에서 사상과 실천의 경향을 묘사하는데 사용한다. 이 용어를 종파 혹은 분파로 번역하는 것을 정확하지는 않지만, 학파가 더 정확한 번역일 것이다. 왜냐하면 요세푸스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리고 에세네파를 헬라 철학과 비교하여, 유대인이 존중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거를 요구한다면 어려운 문제다. 또한 헬라의 철학파들은 교리에 대한 학적인 연구에 종사하지 않고, 오히려 생활 양식에 관심을 두었다. 정치적 관심에서 보자면, 학파라 할 수 없고; 생활 양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학파가 적절할 것이다.

여록, [유대 고대사]의 친-바리새적 성향?

요세푸스가 친-바리새적이었다는 주장이 있다(R. Laqueur; Hans Rasp; Morton Smith; Jacob Neusner). 노이스너는 미쉬나와 복음서에 근거하여 바리새인은 종파 집단과 같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요세푸스의 친-바리새적 성향의 주장에는 난점도 있다. 첫째, 다른 집단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다루고 또한 반-바리새적인 부분도 있다. 둘째, 유대인 안정의 입장에서 집단들에 대한 태도를 보일 뿐이다. 셋째, 90년경 팔레스틴에서 그들의 역할은 불확실하다.
바리새인의 정치적 영향력
노이스너는 바리새인들이 헤롯과 로마의 통치 시기에 정치적으로 활약하는 집단으로 존재하는 것을 종식하고 분파적 특성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첨예한 대조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다양한 사회에서 왕권의 후견인을 갖지 못한 미력한 요소(minor factor)로서 존재했지만, 세력과 영향력에 관심을 두었다.

신약성서의 바리새인

복음서는 예수의 시대와 그 생애를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기에, 우리가 역사적 바리새인을 연구하는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특히 복음서 저자들은 서사적 및 신학적 목적을 위해 바리새인들을 다소 변화시킨다(Malbon). 따라서 복음서를 분석할 때, 특별한 관심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사회적 관계, 명예와 수치 체제, 후견인과 의뢰인 관계, 연맹 그리고 당파 등에 있어야 한다.

신약성서의 바리새인 묘사들

신약성서의 바리새인에 대한 묘사를 요약한다:
첫째,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바리새인들은 여러 집단들과 관련되어 묘사된다: 서기관들(막 7:1-23), 헤롯당(막 3:1-6; 12:13), 사두개인들(마 3:7-10), 심지어 대제사장(마 21:45). 때때로 집단들은 서로 대적하기도 하지만, 예수에 대항할 경우에는 서로 연대한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들을 이차적인 것으로 간주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 마가복음 2장 6절과 12장 38절이 "서기관들"만 언급하는데, 마태복음 23장과 눅가복음 5장 21절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언급한다. 학자들이 Q로 간주하는 구절에서 마태복음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3:7-10)은 누가복음의 "군중들"(3:7-9)보다 원형적이지 못하다. 이와 비슷하게 마가복음 8장 11절의 바리새인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마 16:1) 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마 12:38)이 된다. 그러므로 후기의 자료에는 이름들을 덧붙임으로 일부 에피소드에서 예수의 반대자들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둘째, 바리새인들은, 비록 그것이 "구전 토라"의 형태가 아닐지라도 "장로들의 유전들"을 가지고 있다(막 7:5).
셋째, 먹는 것과 의식적 정결이 많다(막 2:15-17// 마 9:10-13// 눅 5:29-32; 막 7:1-23// 마 15:1-20// 눅 11:37-41).
넷째, 다른 문제들에 관한 묘사가 있다. 예를 들면, 안식일(막 2:23-28// 마 12:1-8// 눅 6:1-5; 막 3:1-6; 마 12:9-14// 눅 6:6-11), 결혼(막 10:2-12// 마 19:3-12// 눅 16:18), 메시아 인식법(막 12:35-37// 마 22:41-46// 눅 20:41-44), 그리고 로마의 권위에 대한 순종(막 12:13-17// 마 22:15-22; 눅 20:20-26).
다섯째, 대체로 바리새인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를 부각하는 역할만을 한다. 그들은 와서 예수께 질문을 하지만, 초점음 예수의 답변에 있고; 바리새인은 다시 재치있는 말대꾸를 하지 않는다.
이러한 증거를 해석하는 여러 가능한 방법들이 있다. 첫째, 바리새인에 관한 대부분의 진술, 특히 바리새적 지배를 나타내는 진술이 전승에 대한 70년 후의 추가이고, 또한 후기의 논쟁을 반영하는 것으로 결론짓는 것이다. 둘째, 빌트(Wild)는 묘사들이 기독교인이 된 바리새인들과 그렇치 않은 바리새인들간의 내부적 논쟁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한다. 아마 일부는 기독교인 내부의 논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대부분의 신약 학자들은 예수의 시대까지 소급되지는 않을 지라도 70년 이전의 상황을 다소 제시한다고 한다(Saldarini, 1988: 144-98).

마가복음의 바리새인

텍스트들
연구자가 네 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을 우선적으로 다루는 이유는, 살다리니의 견해와 같이 마가 우선설을 따르기 때문이고, 또한 마가복음이 마태복음보다는 바리새인에 대해 독특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마가복음의 저자는 바리새인과 다른 지도자 집단에 대하여 조리있고 일관된 모습을 제시하는데, 이러한 제시는 팔레스틴 사회에서 예수의 사역과 위치를 이해하는데 적절하다. 하지만 마가복음의 제시는 요세푸스의 제시와 차이가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그 차이는 저자의 관점과 관심의 차이때문일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서기관들과 더불어 바리새인은 갈릴리에서 예수의 주된 반대자로 활동한다. 마가복음을 70년 이전의 전쟁 상황에서 기록된 가정을 수용한다면, 마가복음의 저자는 자신의 지식 혹은 전승 자료에 기초하여 1세기 중엽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다(Hengel).
마가복음에는 "바리새인"이 단독으로 제시된 경우가 5회인데, 그 때마다 그들은 예수와 갈등 관계에 있다(2:18; 2:24; 3:2; 8:11, 15; 10:2).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함께 언급되는 경우는 2회인데, 그 때도 예수와 갈등 관계이 있다(2:6; 7:1, 5). 또한 바리새인은 정치적인 문제에서 헤롯당과 관련하여 2회 제시된다(3:6; 12:13). 이러한 바리새인의 사회적 계층 및 지위 그리고 사회에 대한 그들의 관계는 그들의 지역적 위치와 그들이 다루는 논제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바리새인의 위치
마가복음의 저자는 한 경우(12:13)를 제외하고는 바리새인을 갈릴리에 위치시킨다. 바리새인은 가버나움과 다른 전원 소도시(3:2, 6; 7:1, 5)와 다른 중간지(2:18, 24; 8:11; 10:2)에서 만난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매우 활동적이다. 그들은 다른 집단들과 접촉을 하였는데, 예를 들면 헤로디안들(3:6)과 서기관들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에는 단 한 번 등장하지만, 이것은 저자의 문학적 배열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등장은 그곳에서도 그들의 활동이 있었다는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논제들
바리새인들은 예수와 금식(2:18), 안식일 준수(2:24; 3:2), 이혼(10:2)의 문제들을 두고 예수와 논쟁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손 씻기(7:1) 문제를 놓고 논쟁하고,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예수가 죄인들과 식탁 교제 나누는 것(2:16)을 문제시 한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기적을 요구하면서 예수의 권위(8:11)를 문제시한다. 헤롯당과 함께 바리새인들은 정치적 문제, 즉 로마 세금 문제(12:13)를 두고 예수를 체포하고자 한다.
마가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은 사회의 다른 집단들과 관계를 지니고 있고, 예수에게 반대하여 헤롯당과 정치적 동맹을 맺고, 그리고 헤롯당과 함께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선동으로 예수를 시험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적 유익 집단과 연합하여 활동한다. 특히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아마도 예루살렘의 대표자들일 것이다. 그들의 종교관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에서 생활하는 방식에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적 실천과 공동체의 가치관을 결정하는 정치적, 범적 그리고 사회적 요소들에 가능한 많은 통제와 영향력을 추구했다.
노이스너는 신약성서에서 바리새인의 관심사들이 의식적 정결, 농업적 십일조 그리고 안식일 준수인 것에 기초하여 바리새인이 정치적 활동 세력이 아니라 종교적 분파 혹은 식탁 교제 집단이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 당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노이스너의 제안은 설득적이지 못하다. 더글라스(Mary Douglas)의 인류학적 연구에 기초하여 네이레이(J. Neyrey)는 마가복음에서 정결법이 공동체의 기구(mechanism)를 설정하는 기능을 하는 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연구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특정 공동체를 옹호하는 자들이었다.
예수와 바리새인이 일부 유대인들에게 관심사였던 신학적 논제를 두고 논쟁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동체의 지배를 놓고 경합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갈릴리에서 지도자들로 인정받았다. 이것은 그들이 공동체 안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리새인의 계층과 지위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많은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전통에 도전하는 것에 거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는 다소 사이점이 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과 음식법을 언급하고, 반면에 서기관들은 가르치는 권위를 논쟁한다. 그렇다면 서기관들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권위있는 교사였다는 것이고,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특정의 율법과 실천에 대한 특별한 해석을 지닌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전문가로서 백성들 중에서 영향력과 합성적인 통제를 추구했고, 그리고 이러한 추구에서 예수와 경쟁했다.

랍비적 문헌의 바리새인

랍비 문헌 사용의 타당성
기독교인들은 신약성서에 제시된 바리새인에 대한 변증적 기록을 역사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였고, 또한 그것을 랍비 문서를 이해하는데 사용하려 했다. 이러한 연구에 영향을 끼친 학자는 쉬르어(Sch rer)다. 새로운 연구가 그 동안의 연구에서 간과된 제 2 성전기를 중심으로 다루려할 때 직면되는 문제는 자료와 근거의 부족이다.
랍비 문헌을 1세기의 자료로 활용할 때, 그 전제들이 있다:
첫째, 2, 3세기의 랍비들은 바리새인의 후기 모습이다; 둘째, 그들간의 생활 양식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셋째, 제 2 성전기 사건들과 제도들에 대한 기록들은 자세한 정보에 입각한 것이고 편견이 없는 것이다; 넷째, 랍비 문헌은 바리새인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위한 충분한 정보를 제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들은 바리새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잘못된 것이거나 오용된 것이다:
첫째, 70년 이전의 바리새인들은 70년 이후의 랍비들의 등장에 공헌했지만, 증거는 충분치 않다. 초기 랍비 자료의 tannaitic 저자는 자신들을 바리새인들과 동일시하지 않았고, 바리새주의 외에 유대인 사회와 전통의 많은 다른 요소들은 유대주의가 제 2 성전의 파멸 후의 여러 세기 동안에 취한 모습에 공헌했다. 둘째, 바리새인과 랍비간에 연속성이 있을 지라도, 성전, 예루살렘 지도력, 그리고 분명한 정치적 정체성 등의 상실은 그 상징적 체제, 행동 양식 그리고 가치 등에 뿐아니라, 세계에 대한 유대인의 이해에 주요한 조정을 일으켰다. 셋째, 랍비 문헌(미쉬나, 토세프타, 두 탈무드, 그리고 미드라쉬 수집)과 수집된 전승들은 장르, 목적, 연대, 그리고 기원 등에 있어서 다양하다. 넷째, 다소 믿을 만한 전승들은 예외가 되겠지만, 전승들은 불완전하고 또한 랍비 문헌의 저자들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심도있게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랍비 문헌은 바리새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 자료로 사용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주장의 신뢰성을 결정하기 위하여 역사-비평적 고찰이 필요하다.

70년 이전의 바리새인 전승들

노이스너는 자신의 연구 범위를 70년 이전의 바리새인들에 관한 전승에 한정한다. 그는 655개의 본문에서 371개의 분리된 바리새적 전승들을 발견한다. 이것들 중에 462개의 본문에서 280개의 전승은 힐렐이라 불리는 바리새인 및 그와 관련된 사람들인 샴마이학파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70년 이전의 바리새인에 관한 전체 전승의 75%에 해당한다. 힐렐은 랍비들에게 매우 유명한 인물로, 바리새인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바벨로니아에서 유대로 왔는데, 그를 따르는 힐렐 해석학파는 샴마이 해석학파보다 우세했다.
노이스는 이 전승들이 관심을 둔 첫째 부류에는 농업의 십일조, 제사, 그리고 금기 사항들 등이었고, 둘째 부류에는 의식적 정결례이었다고 한다. 바리새인들을 다른 유대인들과 분리시킨 것은 바로 이전에 성전의 제사장들에게만 적용했던 정결법을 이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히 식사 배경에 적용한다는 원칙이었다. 그것이 암시하는 바는 식탁이 제단과 유사하고, 또한 모든 유대인들이 제사장들이라는 것이었다. 모든 백성들 혹은 적어도 바리새적인 정결법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처에 존재했다. 비록 바리새인이 성전을 반대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없을 지라도, 이것은 성전없는 유대주의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아마도 십일조에 대한 바리새인의 강조는 식탁의 정결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십일조는 팔레스틴 지역에서 섭취된 것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농업 생산물과 주로 관련되었다. 따라서 십일조 규칙은 식탁-교제에 영향을 주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것은 식탁에서 토라를 거역하는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공동체 및 다른 집단들과의 차이를 기념하는 의식적 식사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식사들은 기독교의 성만찬(eucharist)이나 쿰란의 메시아적 식사와 유사하지도 않다. 거룩하게 하는 신성화(sanctification)는 의식적 행위가 아니라 가정에서 모든 식사에 적용되는 그러한 범주였다. 모든 식사는 백성들 중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생생한 신호였다.

Perushim의 정결법

"분리주의자들"을 의미하는 "perushim"은 아마도 외부인들이 바리새인들에게 부여한 부정적인 명칭이었을 것이지만, 후에는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적절한 적절한 이름으로 채택되었다. "거룩함"(Holiness)는 하나님께 받아 들여짐을 의미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을 기쁘게하지 목하는 것으로부터 분리해서 제의(cult)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불결한 것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과정에서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의 사회에서 자신들을 분리시켰다. 토라에 대한 바리새적 해석은 그들을 다른 유대인들과 분리시켰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해석을 전체 사회에 적용하기를 원하는 모습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그들이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랍비 문헌에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요세푸스의 요한 하르카누스의 축제에 대한 이야기에서처럼 서로 경쟁적이다. 그 경쟁은 랍비 전승들에서 의식적 정결과 관련되지만, 정결법은 정치적 결과를 낳았다. 사두개인들과의 경쟁은 바리새인들이 예루살렘에 존재했음을 가늠하게 한다. 랍비적 전승은 토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해석이 갈릴리에서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요세푸스의 제시와 일치한다.
랍비 문헌들은 바리새인들을 식탁-교제 집단으로 묘사한다. 그들의 식사를 중심으로한 규칙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킨 것이었다. 이러한 분리의 목적은 거룩하게 되기 위함으로, 결국은 그들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행위는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결과를 낳았고, 또한 현대적 의미로 단지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랍비 문헌에서 의식의 문제에 대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상반된 태도는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바리새인의 영향력은 예루살렘에서도 있었을 것이다. 랍비 문헌은 바리새인들이 갈릴리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있었다는 생각에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인물 연구 모델을 통한 역사적 바리새인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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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 첫 번째 개인은 어떤 엘레자르다. 요세푸스에 의해서 자세히 제시되고 있듯이([유대인 고대사] 13.288-98), 엘레자르는 요한 히르카누스(135/4-104 B.C.E)와 바리새인간의 단절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에서 핵심 인물이다. 바리새인 동료들을 위하여 하르카누스가 베푼 축제 동안에, 그들은 그를 비난할 것을 전혀 찾지 못했다. 오직 엘레자르만이 그가 대제사장직을 사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르카누스는 분노하여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오만에 대한 죄과를 결정하도록 요청한다. 바리새인들은 엘레자르를 매질할 것을 제안하지만, 하르카누스는 그렇게 가벼운 형벌은 자신의 위엄에 대한 모욕이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그는 바리새인들과 단절하고서 사두개인들과 동맹한다. 전체 이야기는 매우 전설적이어서 역사적 자료로써 신뢰성이 없다. 엘레자르는 바리새인과 관련되어 언급되지만, 한 바리새인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만일 그가 바리새인이었다면, 그는 바리새인으로 정확하게 언급될 것인데, 왜냐하면 대제사장에 대한 그의 경시는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

폴리온(Pollion)
우리의 관심을 끄는 두 번째 인물은 헤롯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그를 "바리새인 폴리온"이라고 부른다. 그와 그의 제자 "샴마이아스"(Samaias)는 헤롯이 평민으로 있을 동안에 지지한 대가로 헤롯에 의해서 영예를 받았다([고대사] 15.3-4). 요세푸스가 폴리온과 샴마이아스를 같이 언급할 때, 두 번씩이나 폴리온만을 바리새인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 구분을 심도있게 다루어야 한다. 하르카누스와 샴마이아스가 바리새인의 제자로 불리는 것은 그들을 바리새인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바리새인 폴리온은 헤롯을 지지한 중요한 인물이다. 이것 때문에 그와 그의 제자들은 왕에 대한 서약으로부터 면제될 수 있었다([고대사] 15.370):
sune,peiqe de. kai. tou.j peri. Polli,wn to.n Farisai/on kai. Samai,an kai. tw/n evkei,noij sundiatribo,ntwn tou.j plei,stouj ovmnu,ein((((
폴리온은 바리새인의 권위있는 대표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대사] 14.172-76에 따르면, 그의 제자 샴아미아스는 헤롯의 지지를 받는 산헤드린의 일원이었다. 헤롯과 관련하여 그 두사람의 역할들은 요세푸스에 의해 혼동되어 있다.

사독(Saddok)
사독은 갈릴리 사람 유다(Judas the Galilean)와 함께 퀴리누스(Quirinus)의 호구조사 때(c. 6 C.E.) 소위 제 4 철학파를 세웠다. 요세푸스는 사독에 관한 다른 말을 하지는 않지만, "유다와 사독이 고무시킨 열심은 우리의 폐허의 원인이었다"([고대사] 18.10)고 비난한다. 요세푸스는 일관성없이 처음으로 제 4 철학파가 다른 유대인 집단과는 공통점이 없다고 진술한다([전쟁사] 2.118). 오히려 후에 그는 "그들의 다른 모든 것이 바리새인들의 견해와 일치했지만, 그들이 자유를 향한 열망만은 예외였다"([고대사] 18.23)고 주장한다. 사독은 그 집단의 대표자가 아닌 다른 바리새인이었다.

시몬(Simon)
누가복음 7장 40-44절에는 처음으로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이름이 나온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이야기의 배경을 갈릴리로 삼는다. 이야기를 통해서 복음서 저자는 긴장과 논쟁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몇몇 바리새인들과 접촉했다는 요점을 말하고자 한다. 그들 모두는 몇몇 손님들에게 숙박을 제공할 수 있는 집주인으로 묘사된다.
니고데모(Nicodemos)
복음서에서 바리새인으로 불리는 다른 인물은 니고데모다. 그는 처음엔 밤에 예수와 대화하고(요 3:1-15), 산헤드린에서는 예수를 변호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했고(7:50-52), 마지막으로는 예수의 장사에 동참한다(19:39). 이 정보에 대한 역사적 신뢰성을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니고데모는 평면적이고 진부한 인물(falt, stereotypical character)이 아니라, 지배 계층의 특출한 인물이다.

가말리엘(Gamaliel)
가말리엘은 두 구절에서 현저하게 다루어진다(행 5:34; 22:3). 가말리엘은 바리새인 운동에 대한 평가에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 왜냐하면 가말리엘과 그의 아들 시몬 벤 가말리엘(Simon ben Gamaliel)은 요세푸스와 랍비 문헌에서 바리새인으로 확인되는 유일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바리새인과 랍비 문헌의 현인들을 연결하는 한정된 인물들이다. 그렇지만 학자들은 가말리엘과 그의 아들이 기존의 랍비 문헌에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가말리엘의 가문과 다른 현인들과의 연결은 희박하다.
사도행전에서 가말리엘은 바리새인으로, 그리고 산헤드린 의원으로 소개되며, 또한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율법 교사로 인정을 받고 있다. 비록 산헤드린에서 가말리엘의 연설이 후대의 작문이라고 평가되지만, 사도행전의 저자는 예수의 제자들과 바리새인간의 긍정적 관계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바울(Paul)
사도행전 22장 3절은 바울을 가말리엘의 제자로 소개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의구심도 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의 일부 동안은 바리새인이었다(빌 3:5-6). 신약 성서에서의 99회 바리새인 언급 구절 중에서, 빌립보서의 구절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제외한 곳에서 바리새인을 언급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바울의 서한은 더 이상 바리새인을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은 바리새인이 되는 것과 율법을 관련짓지만, 문맥은 이러한 동일시가 청중의 관점에서 그에 대한 신뢰성을 강화시킨다는 것을 나타낸다.
바울은 율법에 대한 특별한 관점이나 태도를 바리새인에게 분명히 돌린다. 자신의 과거를 언급하는 갈라다아서 1장 14절을 근거로 말하자면 다메섹 경험 이전의 바울은 진정한 바리새인이었을 것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바리새적 유대주의를 이해함에 있어서 토라와 조상들의 유전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지 다메섹 체험 이전의 삶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바리새인과의 관계에 대한 많은 자료를 담고 있지만, 저자 자신의 관심을 반영한 것들이다. 저자는 토라 준수와 열심을 바울의 바리새주의의 핵심적 요소들로 강조한다(22:3). 사도행전 23장 6절은 말한다: a;ndrej avdelfoi,( evgw. Farisai/o,j eivmi( ui`o.j Farisai,wn\ 이러한 진술을 하는 저자의 관점으로는 당시 바울은 예수의 추종자이면서 동시 바리새인이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리새 학파에 속했던 일부 신자들"을 언급하는데(행 15:5), 이것은 바리새인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간의 친밀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헨첸(Haechen)은 저자가 양자간의 가교가 가능한 것으로 확신했다고 말한다.

요세푸스(Josephus)
요세푸스는 그 자신을 바리새인으로 말하지만, 바리새인과의 관계예 대한 그의 입장을 볼 때 다소 의심적이다. 게다가 마슨은 요세푸스가 자신을 바리새인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단지 자신의 공적 삶의 진보에 필요한 경우에는 바리새적인 정치적 프로그램을 따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요세푸스가 바리새인과 스토아학파를 비교한 것은 이상하다.

시몬 벤 가말리엘(Simon ben Gamaliel)
요세푸스가 자신을 체포하려는 사람을 긍정적으로 평가([생애] 191-92)한 이유는 불확실하다. 마슨은 요세푸스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반대자의 유명한 특징을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한 반면에, 코헨은 화해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경우든간에, 시몬이 저명한 인물임을 분명하다. 그가 기스칼라의 요한(John of Gischala), 즉 갈릴리 출신의 저항 지도자와 오랫 동안 가까이 지낸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시몬은 예루살렘과 깊은 관련이 있고 사두개인 대제사장 안나누스(Ananus)에게 영향력을 행사했고, 요세푸스를 제거하기 위한 사절단-바리새인과 관련된 평신도인 요나단와 안나니아스, 그리고 제사장 가문에 속한 요자르, 그리고 대제사장 후손인 시몬-을 보내기도 했다. 이로 보자면,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이나 다른 집단들과 조직적으로 반대한 것은 아니다.

역사적 바리새인과 관련 집단들

바리새인과 토라

일부 학자들은 집단의 원리적 특성인 토라에 대한 랍비적 개념을 지적했다. 리프킨은 바리새인들이 모든 텍스트에서 이중적 율법―구전 율법과 기록된 율법―의 옹호자라고 진술한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이중적 율법의 우위성에 헌신한 학자 계층(scholar-class)이었다고 생각한다. 핑켈(Finkel)은 바리새적 교사의 주요 임무는 이전 세대들에 의해서 전수된 어떤 논박을 전수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블랙(Black)은 기독교의 성서의 진술에 자신의 논증을 기초하면서 바리새인의 근본적으로 형식적인 특성과 장로들의 전통에 대한 그들의 존중에 초점을 두었다. 만수르(Mansoor)는 바리새인을 그들의 형식적 차원에 대한 진화적이고 비-문자적인 접근을 따르는 것으로 그리고 그리고 구전 율법이 기록된 율법과 동일 효과가 있는 것으로 믿는 것으로 기록한다(Baron; Bowker; Guttman; Le Moyne; Zeitlin).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요세푸스의 바리새인에 대한 묘사가 그들이 구전 전승을 가졌다는 생각을 지지한다고 주장한다(Rivkin; Finkel; Zeitlin). 요세푸스는 바리새인들이 그들 자신의 전승을 가졌다고 진술하지만, 그는 이것들이 구전적으로 형성되었거나 전수되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노이스너는 랍비적 전승의 구전 전수에 대한 가장 초기의 주장이 바 코흐바 전쟁 뒤에 있었다고 증거했다.

바리새인과 정결법

일부 학자들은 정결에 대한 바리새인의 관심이 그 집단의 중심적 특징이라고 주장했다(Meyer; Le Moyne). 노이스너는 "식탁 교제"를 특별히 언급하면서 바리새인 중에서 정결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는 바리새인에 관한 랍비적 전승의 67%가 식탁 교제와 관계된다고 특별히 언급한다. 그는 힐렐파와 샴마이파의 많은 규정들이 음식과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을 제시했다. 그러나 노이스너는 식탁 교제가 특별한 제전이나 특별한 의식을 요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이 "매일의 일상 생활에 적용되고, 또한 모든 비-의식적 식탁 교제가 발생하는 동일한 경우에 개인 가정에서 준수되었다.... 이것은 실제의 정결-규율과 음식 규제를 더욱 중요하게 만들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바리새인들을 사람들과 분리시켜 주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다.

바리새인과

블랙은 매우 일반적인 견해, 즉 바리새인들의 주요 관심이 불결, 특히 땅의 불결한 사람들로부터 분리였다고 표현한다. 바리새인과 #rah ~[간의 관계는 모호한데, 왜냐하면 후자 집단의 정체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핑켈은 #rah ~[이 바리새인을 존중하는 시골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바리새인들은 도시에 살았기에 분리하였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가정 혹은 그들의 생산물에 대해 지시된 엄격한 규범(code)을 준수할 수도 없었다. 불행하게도 핑켈의 사회학적 구별을 지지하는 증거는 없다. 마이어는 #rah ~[이 제사장의 정결 규례를 추종하지 않은 비-제사장적 다수파(non-priestly majority)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서술을 지지하는 증거도 없다.
옾펜하이머(Oppenheimer)의 #rah ~[에 대한 최근 연구는 세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는 현대의 비-이스라엘 학계를 실제로 무시한다. 그가 언급하는 많은 비-이스라엘 저자들은 지난 세기의 독일-유대인 저자들이다. 종종 사람들은 그 저자들의 논제들과 문제들 중에 많은 것들이 시대엥 뒤진 학계의 결과들이라는 인상을 가진다. 둘째, 옾펜하이머는 텍스트의 문자적 의미를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과 자료 비평과 문헌비평에서 사소한 시도 사이를 오고간다. 이러한 동요는 동등하지 않은 가치의 논증을 하게 만든다. 셋째, 그는 후기 랍비의 수집들이 초기에 관한 앞선 수집들과 동일한 가치의 증거를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는 가능성을 무시한 듯하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옾펜하이머는 몇 가지 흥미로운 관찰을 제시한다. 그는 #rah ~[이 계명들을 준수하길 갈망했지만, 그들이 그 준수에 철저히 그리고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았다고 제안한다. 여기서 옾펜하이머는 예레미야스와는 다른데, 왜냐하면 예레미야스는 #rah ~[에게서 정확한 율법 준수를 기대할 수 없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 #rah ~[을 말하기 때문이다. 옾펜하이머는 율법의 문제에 관한 #rah ~[과 연구 문제에 관한 #rah ~[간을 구분지었다. 바리새인과 상반된 집단이 바로 율법의 문제에 관한 "#rah ~["이었다. 게다가, 그는 대다수의 #rah ~[이 아마도 대중에 속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 중에 일부는 부자였을 것이고 귀족 계층의 일원들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정결과 십일조 문제가 바리새인과 #rah ~[을 구분한 주요한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는 절대적이지 않다. 옾펜하이머는 바리새인과 #rah ~[이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주장하는데, 이 관계는 특정 영역에서 #rah ~[와 접촉을 자제할 때 바리새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약화되지 않고 지속되었다. 이 진술은 노이스너의 진술, 즉 일반적인 경건으로부터 바리새인의 분리가 거의 분명하게 오랫동안 그리고 점진적 과정에 있었다..... 왜냐하면 신앙 생활의 생부 사항에 대한 새롭고, 정확한 율법이 즉시로 고안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는 말과 연결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바리새인과 tworWbx'
tworWbh'(비밀 모임, 성직자 수도단)의 문제는 바리새인과 #rah ~[의 문제와 관련된다. ~yribex'(동료들)이 그들의 분리를 정결과 십일조에 근거했다고 일반적으로 주장된다(Westerholm; Meyer; Neusner; Oppenheimer). 반면에 리프킨은, 비록 ~yribex이 바리새인과 "매우 친밀한" 상태였을 지라도, 그들은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영적인 사회적 운동을 구성해지만, 반면에 ~yribex은 폐쇄된 모임을 속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이스너는 비록 ~yribex이 바리새인이었을 지라도, 모든 바리새인이 ~yribex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옾펜하이머와 노이스너는 ~yribex이 자신들을 전적으로 바리새인 사회와 분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이스너는 옾펜하이머가 말하는 것보다는 더 공식적인 분리를 선호한다.
역사적 바리새인의 이미지(image)

영향과 통제

유대교에 대한 현재의 학자들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편재할 뿐아니라 지배적인 두 유령적 모습, 즉 바리새인과 산헤드린을 발견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극단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을을 수도 있다: 첫째, 바리새인들이 삶의 모든 국면에 일반적인 감독을 했다; 둘째, 그들은 개인적인 식탁 모임을 구성하기 위하여 사회에서 분리했다.
그러나 인물 연구를 통해 보았을 때, 바리새인들은 정치적으로 활동적이었지만, 소수당의 입장이었거나 다른 사람의 권위를 받아들여야 했다. 바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유다 지역에서 활동했거나 유다 출신들이었다. 필리온, 가말리엘, 가말리엘과 그의 아들, 시몬 등은 지도력을 행사했다. 여성의 이름이 바리새인으로 제시되지는 않았다. 요세푸스의 애매한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바리새인이 되는 방법에 대한 진술은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바리새인의 이미지는 사회학적 분석에서도 동일하다. 유대인 지도층, 즉 대제사장, 대제사장들, 장로들, 그리고 유명 인사들은 렌스키(G. Lenski)가 말하는 가신(retainers)들의 원조를 받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바로 이러한 가신의 부류에 속했다. 샌더스는 바리새인의 영향력에 대해서 다음처럼 정리한다. 헤롯의 시대에 그들의 힘을 미력했고, 제도적 권위를 지니지도 않았다. 물론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그들이 간접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고 진술하지만, 살로메 통치 이후로는 온건하고 비효과적 반대를 주도했을 뿐이다. 바리새인들이 모든 회당을 주도한 것은 아니다. 그는 심지어 디아스포라에게알려진 정결 관행도 바리새적 영향력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비록 그들이 1세기에 다소 영향력을 행사했을 지라도, 정치적으로 막강하지는 않은 듯하다. 로마 전쟁으로 다른 집단들이 정치적 근거를 상실했거나 혹은 그들이 타락한 모습을 보였을 때, 토라에 전문가였고 토라를 지속적으로 해석했던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의 정의(definition)에 따라 유대주의를 다시 세울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의 가치관은 항상 정치적 함축성을 지녔고, 그 실현을 이룩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정치권에서 밀려 났을 때, 그들의 해석과 실천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시켰고 사회에 대한 동화에 저항케 했다. 일단 세력을 확보했을 때에는 프로그램을 준비시켰다.

바리새적 통제와 대중성: 변증자의 관점

전통적으로 유대인 학자들(A. Guttman; H. Maccoby)과 기독교인 학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실제로 사람들의 관심 영역인 종교적 생활의 부분들을 통제했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한 진영의 변증적 견해는 바리새인이 유대교를 통제했고,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했다는 것이고, 반면에 다른 진영의 견해는 바리새인이 유대교를 통제했고, 그들은 무시무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양진영의 학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새로운 지배 계층"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샌더스는 양진영의 변증으이 출발점을 부인한다. 바리새인의 통제력이 미력했다는 점에 동조하는 학자들도 많다(Smith, Neusner, Cohen, Goodman).
주전 63년에서 주후 66년간에 바리새인은 역사의 뒤안길에 있으면서, 몇 차례의 반-로마 운동을 전개한다(주전 20년과 4년 그리고 주후 6년). 그들의 분출은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들이 지속적으로 가르쳤다는 것, 그들이 영향를 끼쳤다는 것, 그리고 때로는 저항을 야기시켰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들의 분출은 바리새인들이 공적 생활에서 분리했다는 노이스너의 견해를 반대하지만,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그들이 정부 혹은 종교를 주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지한다.

사회적 및 경제적 상태

고대 종교 사회에서, 특히 로마 제국과 팔레스틴의 유대인 사회에서, 종교는 공동체의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조직과 어우려져 있었다. 그러한 사회에서 살았던 바리새인은 정치적 영향력을 전혀 지니지 못한 채로 사회로부터 소외된 종파(sects)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곧 유대인 사회의 일부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제의적 혹은 종교적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 다소의 독립적인 분파나 집단들 혹은 지도력을 형성할 수 있었을 지라도, 전체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은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에 묶여 있었다. 바리새인도 바로 그러한 구도에 속했던 것처럼 보인다.
바리새인의 사회적 위치는 불명확하다. 바리새인이 된다는 것은 직업이 아니었고, 유대인으로서 사는 방식이었다.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평신도들로 구성되었다. 평신도들인 바리새인들은 토라를 연구하여 자신들의 견해를 형성했다. 모든 자료들이 보여주는 그들의 토라에 대한 일관된 헌신은 그들의 본래적 프로그램이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야기되는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한 토라 준수의 회복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토라에 대한 엄격한 해석에 따라서 유대주의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것은 바리새인을 정치적 관심을 가진 집단으로 만들었다. 만약에 바리새인들이 율법 전문가들이었다면, 그들 중에 대부분은 서기관들이었음에 틀림없다(참고. 막 2:16).
일부 바리새적 제사장들이 있었고, 바리새적인 지배 계층도 있었다.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지배 계층에 종속된 상태였지만, 소작농민이나 장인들과 같은 하위 계층의 사람들보다는 높은 지위의 상태였다. 요세푸스는 제사장인 바리새인 한 사람을 언급하고, 랍비 문헌은 중요한 직책을 감당한 몇 사람을 제시한다. 물론 소수의 바리새인은 상인이나 무역상이었다는 주장도 있었고, 노이스너는 소수의 독립지주도 있었다고 말한다.
바리새인들이 서기관들, 재판관들, 교사들, 그리고 제사장들이었다는 인식은 집단들에 대한 세 가지 일반적 고찰로 이끈다. 첫째, 집단들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았다. 개인들은 동시에 한 집단 이상에 속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의 이상의 사회적 집단에 속했을 것이고, 하나 이상을 직업을 가졌을 것이다. 둘째, 집단들은 시간에 따라 변했다. 하즈모니안 왕조 때의 바리새인들은 1세기 바리새인들과는 달랐을 것이다. 셋째, 집단들은 몇가지 기능을 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교제였고 동시에 정치적인 관심을 가진 집단이었을 것이다.

대의를 위한 죽음

황금 사자 사건, 갈릴리 유다의 봉기, 그리고 반-로마 전쟁 등의 세 사건은 하나님을 위하여, 율법을 위하여, 그리고 참가자 자신의 명분을 위하여 죽은 가치있는 예들이다. 이 사건들은 바리새인들과 관련있고 시카리들과는 더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갈릴리 유다의 봉기는 바리새인 사독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반-로마 운동의 주동자들과 바리새인간에는 역사적 및 이념적 관련이 있다.

바리새인의 신학

초기의 랍비 문헌들은 주로 형식적이고 법적인 것들을 논쟁적 형식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신학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지 못한다. 하지만 바리새인의 "자선"에 대한 문서는 도움이 되겠지만, 남아있지 않다. "18개 축복문"은 바리새인의 신앙을 반영할 수도 있다. 또한 신약성서와 요세푸스의 문헌도 바리새인의 신학에 대한 적절한 정보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요세푸스는 바리새인의 신학에 대한 두 요점을 간략히 제시한다: 부활에 대한 신앙과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 의지의 협력.
샌더스는 [바울과 팔레스틴 유대교]에서 1-2세기 랍비 문헌과 200BC-200CE의 주요 문헌에 "언약적 규범주의"(convenantal nomism)가 전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신학을 탄나이틱 미드라쉼(tannaitic midrashim)의 비-형식적 부분과 바울의 주장을 비교적으로 고찰한 후 이러한 언약적 규범주의를 70년 이전의 바리새인의 신학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의 섭리와 자유 의지

우리는 이미 요세푸스가 하나님의 섭리(운명)와 자유 의지에 대한 신앙을 바리새인들에게로 돌림을 고찰했다. 이전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와 개인의 자유 의지를 주장한다(롬 8:28f; 롬 9; 롬 10:14-17). 미쉬나 역시 이러한 견해를 R. 아키바에게 돌린다(Avot. 3.16). 이 세 사람은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두 견해가 조화되는 방법은 설명하지 않는다. 종교적 양심은 하나님에 의한 전적인 결정과 개인의 책임을 표현하게 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foreknowledge)를 고백하게 하고, 계명들을 믿는 믿음은 개인의 선택에 대한 가정을 요구한다. 바리새인들은 은혜에 의한 선택과 자유 의지에 의한 순종을 믿었다.

자비(leniency)
요세푸스는 자비를 바리새인들에게 돌린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들은 하르카누스가 엘레자르를 처형하는 것에 반대하고([고대사] 13.294), 안나누스가 주의 형제 야고보를 처형할 때도 바리새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반대한다([고대사] 13.299-200). 사도행전에서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산헤들린에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선대한다(행 5:33-40). 미쉬나 논문집 산헤드린은 주로 법정과 변호를 다루는 것인데, 그 문헌 역시 관대함을 보인다.

엄격성과 정확성
요세푸스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관련해서 엄격 혹은 정확하다고 한다. 그가 바리새인을 다룰 때 사용하는 용어인 "avkri,beia"는 율법을 정의함에서 '정확'을 그리고 율법을 준수함에서 '엄격'을 의미할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요세푸스는 대개 해석의 정확성을 언급할 때 사용한다([전쟁사] 2.162; 1.108-9; [생애] 191). 사도행전 22장 3절과 26장 5절은 동일한 용어를 바리새인에게 사용한다. 랍비 문헌도 예외는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
모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살게 되기를 바랬다; 이것이 가능하지 않을 경우,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존재를 허락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신들의 대의를 위해 기꺼이 죽기를 원했다. 집단으로서 바리새인은 이러한 신념을 확고하게 나타냈다. 이러한 신앙을 샌더스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으로 말한다. 이러한 신앙은 죽음 이후의 개인의 생명에 대한 언약적 원칙의 적용을 보여준다.
전통들
바리새파의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는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헌신이다. 요세푸스([고대사] 13.297)와 신약 성서도 이를 지지하는데, 신약성서에는 이러한 유전 중에 두 가지를 "손 씻기"(막 7:1-8)와 고르반(7:11)으로 부른다. 랍비 문헌과 미쉬나 Avot는 장로들의 유전들을 언급하고 있다. Avot는 장료들의 유전 계보를 제시한다:
모세
.....
힐렐과 샴마이
가말리엘 요하난 b. 잨키
시메온 b. 가말리엘 그의 제자들
랍비(유다 하-나시) (특히 엘리제르 왕과 요수아)
이 계보는 경쟁 관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가 자신들을 70년 이전의 바리새인의 후예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신학적으로, 전통들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것들의 상태(status)다. 학자들은 랍비 문헌에 따라 바리새인의 성서외의 규율을 '구전 율법'이라 부르고, 또한 바리새인들이 구전 율법의 기원을 기록된 율법, 즉 시내산에서의 모세에게 둔다고 주장하지만, 샌더스는 그러한 경향에 반대하면서 그 예들을 제시한다.
바리새인의 행습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법의 반-사회적 국면들이 된 전통을 만들었다. 한 예가 음식을 나르도록 집들을 연결지어 건축한 경우다(헤루빈). 축제일 동안의 일로 간주되는 논제들, 예를 들면 사다리를 옮기는 것 또는 희생 제물의 머리에 손을 놓는 것은 바리새적 전통으로 간주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후기에도 샴마이학파와 힐레학파간에 계속적으로 논의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의도적 범죄에 대한 징벌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근거는 없지만 아마도 화목제를 드림으로 해결했을 것이다. 샌더스는 노이스너의 견해와는 달리 유대인들이 안식일과 안식년을 준수했다고 말한다. 안식년의 의도는 차용자에게 정기적인 쉼을 주려는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이 채무를 받기 위해서는 "공회 앞에서"(prosbul) 그 의도를 선언한 것으로 보아 바리새인들은 귀족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십일조, 정결 그리고 배타주의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식탁 교제를 중심으로 한 배타주의적 종파였는가? 바리새인들은 공공 생활에 동참했고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생활했다. 그들은 활동을 위하여 여행을 하기도 했다(바울, 마 23:15). 센더스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준수와 식탁-교제에 특별한 관심을 둔 폐쇄 공동체라는 가정에 반대한다.
바리새인들은 의식적 정결에 관심을 두었다. 제사장 종교에서 제사장은 정결한 것과 불결한 것을 선언했다. 정결의 정도는 하나님께 나아감의 정도를 결정했다. 하나님께 가장 접근한 사람은 사회의 중요한 일원이었고, 또한 그것은 권세, 영향력, 그리고 부와 관련되었다. 제사장은 그러한 선언을 통해서 사회를 통제했다. 그러한 사회에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토라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준수에서 확보했다. 이러한 권위는 제사장의 권위를 위협했고, 또한 재정의된 정결법에 따라 공동체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은 반드시 제사장일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거룩은 바리새인의 정결법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맺는 말

이상으로 발표자는 "최근의 역사적 바리새인 연구"라는 제목으로 바리새인 연구를 소개했다. 특정 주제에 대한 창조적 탐구라기 보다는 기존의 연구 경향들을 소개했다는 점을 우선적으로 밝히고 싶다. 바리새인 연구에 대한 개관이 주는 가치를 경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고찰은 우리로 하여금 바리새인 연구에 대한 여러 지침들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첫째, 문헌을 중심으로 바리새인을 연구할 때, 연구자는 개개 문헌들이 제 각기의 이념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해야 한다. 요세푸스의 이념, 신약성서 각권의 이념, 그리고 랍비 문헌의 이념 등은 공유적일 수도 있고 상이적일 수도 있다. 문헌의 이러한 특성을 무시한 채로 무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는 바랍직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선이해로 갖고 있는 바리새인의 이미지는 어느 이념에 속한 것인가를 질문할 필요가 있고, 새롭게 이해될 부분의 필요도 자각해야 한다.
둘째, 문헌을 이해하는 연구자의 입장, 즉 전제의 타당성을 질문해야 한다. 연구자가 단지 역사가인가 아니면 신앙인인가? 만일 신앙인이라면, 유대주의를 신봉하는가, 개신교인인가, 혹은 가톨릭 교인인가? 독자-반응 비평을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연구자의 입장에 따라 문헌이 달리 이해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실정이다. 바리새인 연구사에서 밝혀듯이 학자들마다 주장이 상이하다. 객관적 이해를 시도하려는 목적에서 적절한 방법론을 계발하는 것이 요구된다. 발표자는 역사-비판적 모델, 인물 연구 모델, 그리고 사회학적 모델 등을 소개하고 그 결과들을 제시했다. 이러한 제시에 남는 아쉬움은 일관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모델을 소개하지 못한 점이다.
셋째, 바리새인을 중심으로 한 주된 논제들에는 문헌과 이해 방법론 외에 바리새인의 기원과 역사, 바리새인의 정치성 및 사회적 관계, 바리새인의 신학과 행습, 집단으로서 바리새인과 개인으로서의 바리새인 등이다.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학자들의 결론은 무지함의 고백일 것이다. 이러한 결론의 원인은 자료의 성격 문제가 크다. 그리고 방법론의 문제도 있다. 발표자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여러 모델들의 결론을 제시하면서 여전히 질문으로 삼고 있는 주제가 있다. 그 주제는 바로 바리새인의 조직이다. 발표자가 이 주제에 관심을 둔 이유는 바리새인이 획일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인물 연구를 통해서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사역 및 초기 기독교 운동에서의 그들의 역할을 재평가함으로 바리새인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신약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의 부정적 이미지와 긍정적 혹은 중립적 이미지에 주목해야 한다. 인물 연구를 통해 보았듯이 마가복음보다는 마태복음은 예수와의 관계에서 바리새인을 더 부정적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누가-문서는 바리새인과 기독교 공동체간의 화해를 반영한다. 그리고 바울은 긍정적 혹은 부정적 입장을 보인다. 그렇다면 신약성서 자체도 바리새인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를 지배하는 사상은 주로 부정적인 면이 강하다. 그렇다면 신약 성서 연구자는 이렇게 다양한 가치 이념들을 균형있게 설명할 수 있 수 있어야 한다.
발표자는 이러한 해결 문제들을 제시한 채로 발표를 마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왜냐하면 이것을 토대로 새로운 차원의 바리새인 이해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참고 : 바리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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