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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7-01-22
 제목  C. C. 빈턴(Vinton, Cadwallader C. 1856~1936) 선교사
 주제어  [내한 선교사] [양화진 선교사] 의료선교사 성경보급 성서출판
 자료출처  양화진선교회  성경본문  
 내용

C. C. 빈턴은 1856년 미국에서 출생했다. 1891년 4월 3일 미국 북 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했다.

내한 초기 제중원 의사를 시작으로 원장이 되었다가 ‘육체를 치유하는 것보다 영혼의 구원이 더 중요하다’ 생각하고 1893년 11월 사임하고 자택에서 진료와 복음 전도를 겸하였다.

그는 한글 성서의 출판과 보급을 위하여 성서공회(聖敎書會) 창설에 참여하여 기초를 확립하였으며, “상임성서실행위원회가 한글 신약 전서의 단편 성경들을 처음으로 출판하기 시작했을 때, 그 관리인(Custodian)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성서공회사, Kenmure편지, 1904)이 있다.

그는 평양, 의주, 만주 등지를 자주 여행하면서 전도했다. 1891년 여름에는 마펫(Moffett)과 만주에서 털리(Turley)에게 ‘로스역 성경’ 출판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성경은 잘 읽혀지지 않고, 벽지로 발라지며, 폐지로도 팔고 있다고 했다.

그는 1897년 4월 1일 창간한 장로교 최초의 신문인 그리스도 신문(The Christian News)의 편집인(Business manager)으로 활동했다. 이 신문은 2부가 왕실에 전달되고, 정부는 460여부를 구입하여 서양의 문명 계몽 용도로 전국의 관청(367군, 중앙부처)에 보급했다. 그는 전도를 위한 기금 확보를 위하여 ‘재봉틀’을 수입하여 팔았고, 성서공회 건물을 이용하여 ‘벽지장사’를 하기도 했다.

1904년에는 부산 나병환자 수용소 설치에 공헌했다. 그는 1907년 12월 16일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1908년 미국으로 돌아가 1936년 6월 26일 뉴욕에서 별세했다.


 


◇ 양화진에 묻힌 빈턴(Vinton)선교사 부인과 세 아들

양화진 제1묘역 ‘아열’에는 1891년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1907년까지 16년간 제중원(세브란스 병원 전신)원장과, 그리스도 신문의 편집인(사무장) 등 문서 선교에 힘쓴 C. C. 빈턴 가족 묘지가 있다.

그의 부인 레티샤(Letitia) 선교사와, 캐뒤(Cadwy), 토미(Tommy), 왈터(Walter) 등 세 아들이 묻혀 있다.

레티샤 빈턴(Vinton, Letitia Coulter)은 1873년 1월 31일 영국 글래스고에서 출생하여, 1891년 4월 3일 미국 북 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한국에서 12년(1891-1903)간 활동하면서 남편의 선교 사역을 협력하다가 1903년 12월 4일 30세의 젊은 나이로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아-4)에 안장되었다. 또한 아들 캐뒤(Vinton, Cadwallader C.)는 청일 전쟁기간 중 한국의 기후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1894년 8월 22일 사망하여 아-6에 묻혔다.

토미(Vinton, Thomas)도 1896년 8월 19일 사망하여 아-5에 묻혔으며, 왈터(Walter)도 사망하여 양화진 아-7에 묻혔다. 그러나 생존한 빈턴 가족은 도로시(Dorothy) 및 휴(Hugh C.)가 미국 오레곤주(Portland)와 워싱턴주(Seattle)에 살았다는 로드(Rhodes, Harry A.)선교사의 기록이 있다.

◇ 청일 전쟁과 더위로 희생된 선교사 가족들

1894년은 동학혁명(東學革命)과 청일 전쟁(淸日戰爭)으로 한국 사회는 극도로 불안했다. 그해 여름은 폭염(暴炎)까지 겹쳐 더욱 힘들었다.

일본군은 톈진조약(天津條約) 위반을 구실로 청일 전쟁에 승리하여 궁궐(宮闕)까지 장악했다. 혼비백산한 백성들은 피난 행렬이 이어지고, 미국은 자국민 보호를 위해 해병대를 투입하여, 집안에 머물도록 했다.

방안에만 갇혀 지내던 선교사 가족들은 무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여 병으로 앓거나 희생되었다. 빈턴 2세 캐뒤도 이때 사망했다.

당시의 상황을 언더우드 부인 릴리어스(Lillias)는 에 이렇게 기록했다.


“전쟁 동안에는 모두 서울에 남아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몹시도 무더운 날 울안에만 갇혀 지내던 선교사들이 병에 걸렸다. 전킨(Junkin)목사 부부도 우리 집에서 여름을 보냈지만 아이 한명이 죽고 말았다. 이는 몇 주 동안의 더위로 희생된 사례였다. 언더우드와 우리 아들도 여름 내내 앓았다. 에비슨 가(家)의 두세명, 알렌 가의 두 명, 아펜젤러 가의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스크랜톤 가의 아이들은 열 때문에 쇠약해 졌다. 홀 의사는 열병에 걸려 죽었다. 빈턴 부부의 아기도 그해 여름에 죽었다.”

한편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는 甲午에 “日淸이 失和하야 彼此에 交鋒하므로 京城에서 義州까지 兵火가 經한 沿路는 安堵키 不能한지라 宣敎師 等은 京城으로 避寓하고, 我敎徒 等은 山峽에 逃散하니”라 기록되었다.

 

 

>> 목차고리 : 신학 > 선교 > 선교사

>> 연결고리 : 내한 선교사, 양화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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