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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7-01-22
 제목  조지 A. 테일러(Taylor, George Alexander,1829~1908)
 주제어  [외국인] 금광 노다지
 자료출처  양화진선교회  성경본문  
 내용 조지 A. 테일러(Taylor, George Alexander,1829-1908)는 1829년 3월 17일 미국에서 출생했다. 그는 버지니아와 알라스카에서 금(金)을 채굴한 경력이 있으며, 1896년 11월, 67세의 고령으로 내한했다. 평안북도 운산 금광의 제임스 모스(James Morse)와 동업자 레이 헌트(Leigh S. J. Hunt)의 금광에 한국 최초 채금(採金) 전문가로 일하기 위해서였다.

이 금광은 1896년 미국무역(American Trading Co.)이 광권(鑛權)을 허가받아 동양연합광산(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에 승계되었다. 이 광산은 너무 많은 금이 생산되어 일명 “노다지”로 불려 졌다.

노다지란 목적한 광물이 쏫아져 나오는 광맥(Bonanza)의 뜻으로 사용 되지만 이 용어는 “운산금광”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금을 찾아 너무 많은 사람이 접근하여 “노터치(No touch)"라는 접근 금지 경고판을 써 놓았는데 이 표시가 금이 많이 나오는 상징으로 오인되고 ”노터치“가 “노다지”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금광은 고종 황제에 의하여 1910년까지 광권(鑛權)이 보호되고, 그 후 총독부도 개입하지 않아 1939년까지 미국인 광산으로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조지 테일러는 이 광산에 종사하면서 한국 무역업의 기반을 구축할 정도로 큰 돈을 벌었다. 그러나 1908년 12월 10일 79세로 한국에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가-21)에 묻혔다.

묘비에는 “한국 광산 개척자(Pioneer mining engineer to Korea)”, “Master, the long, long shift is o'er, I have earned it Rest.(주님!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라 쓰여 있다.


◇ 무역의 선구자 앨버트 W. 테일러

조지 A. 테일러의 아들 앨버트 W. 테일러(Taylor, Albert Wilder)는 상속 받은 재산으로 형 윌리암(William)과 서울 소공동에 “W. W 테일러무역회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G.M), 포드, 크라이슬러, 오버랜드(Overland) 등에서 제작한 “자동차”를 한국에 수입. 판매하였다.

또한 미국의 영화사로부터 영화(필림)를 수입하여 여러 극장에 대여하였다. 쉐퍼(Sheaffer) 만년필을 포함한 수많은 생활 용품들도 그들의 무역을 통하여 한국에 유통되었다.

앨버트 W. 테일러는 메리 린레이(Mary Linley)와 결혼하였으며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서양식 저택을 짓고 살았다. 이 집은 서울 종로구 행촌동 1-18번지에 있으며, 아직도 그 원형이 보존되어 건축가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 이집에 살고 있는 안정희(1931.10.25생), 서금순(1937.10.15생) 증언(2005.7.20)에 의하면 “17가구의 무연고자가 지금도 살고 있으며, 아직도 방음(防音)이 잘되고, 현관 바닥과 창틀이 원형대로 보존되어있다.”고 했다.

이 곳에는 둘레 6.8m, 높이 23m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울시 보호수(고유번호1-10)로 지정되어있다. 이 터는 임진란 때 행주산성 전투에 승리한 권율(權栗, 1537-1599)장군의 소유였으며, 1920년 앨버트 테일러가 구입하여 “즐거운 세상의 궁전(Palace of Earthly Delights”이란 뜻의 “딜쿠슈아(Dilkusha)"로 명명하여 1923년 건축되었다. 전망이 좋고 집이 잘 지어져 주한 외국인들의 사교 공간으로 빈번히 사용되었다.

여주인 메리 부인은 연극배우로 런던에서 연극을 했고. 1917년 앨버트를 만났을 때는 상하이, 요코하마 등 극동 무대에서 활약했다. 서울 외국인학교 공연과 외국인 축제 때에는 연극 지도에 앞장섰다.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되어 1942년 그립숄(Gripsholm) 배편으로 미국에 돌아갔다.

A. W. 테일러는 8.15 광복후 한국에 남겨둔 재산을 회수하고자 미군정청 고문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가 살던 “딜크슈아”는 이미 큰 손실을 입었으며, 불법 점유자들이 살고 있었다. 남기고 간 자산은 은행 계좌에 보존되어 있었으나 그 가치는 매우 낮게 평가되었다.

그는 1948년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가-20)에 안장되었다. 그의 부인은 캘리포니아 맨도시노(Mendocino)에서 1982년 93세로 별세하였다.

앨버트 부부에게 부르스(Bruce)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성장하여 영국 총영사 제랄드 핍스의 딸 조이스 핍스(Joyce Phipps)와 결혼하였으며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양화진에 앨버트 W. 테일러 묘비를 세우려고 스탠리(Stanley, 김익창)씨와 협력 중에 있다.

“광산과 무역의 개척자” 테일러 가문을 소재로 미국 헐리우드에서는 영화 제작을 추진하고 있다. 이 같은 테일러 가문의 행적 조사에 협력해준 스탠리 씨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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