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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7
 제목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6.17~1791.3.2)
 주제어  존 웨슬리 [외국인] [감리회] [목사] [감리교] 모라비안
 자료출처  청교도  성경본문  
 내용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1703년 6월 17일 요한 웨슬레는 사무엘(Samuel)과 수잔나(Susannah) 사이에서 19남매 중의 15번째로 1703년에 영국 엡워스(Epworth) 지방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설교자였으며 교회에서 충성된 봉사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웨슬레 가문의 계보를 살펴보면 그의 조부였던 바돌로메 웨슬레는 그의 집안에서 최초로 옥스포드에서 학업을 연마했다. 그리고 도체스터의 요한 화잇씨의 영향과, 결혼하여 사무엘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웨슬레의 부친이었다. 요한 웨슬리는 신앙심이 많았던 어머니 수잔나 부인에게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735년 10월 14일 요한 웨슬리는 동생인 찰스 웨슬리와 함께 식민지 주민들과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국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2년 동안 조지아에서 사역했으나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1738년 2월 1일 그는 잉글랜드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웨슬리는 모라비안(Moravian) 교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그들이 갖고 있던 구원에 대한 확신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에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모라비아교도 친구인 피터 뵐러(Peeter Bohler)의 간증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구원은 즉각적인 것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진리를 완전히 믿게 된다. 그 후 그의 삶은 놀랍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1739∼1791에 있었던 '대각성 부흥 운동'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웨슬리는 놀랍게도 자기가 설교할 때면 성령께서 강력히 역사 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는 역사를 목격하게 된다.
요한 웨슬리가 이끄는 감리교도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이를 시샘한 국교회에서는 깡패를 동원하여 핍박을 본격적으로 하였다.

 

또한 '나의 교구는 전 세계요, 세계는 나의 일터다.' 외치며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였고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단 한 사람만 남아 있더라도 나는 그 사람을 위하여 땅 끝까지 달려갈 것이다' 라며, 1753년 직접 발벗고 세계선교에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왜소하였지만 그처럼 작은 몸 안에 세계를 흔드는 힘이 들어있었다. 요한 웨슬리는 전도하기 위하여 50년 동안 말을 타고서 지구10바퀴 이상 되는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 틈에 2백 권이 훨씬 넘는 책을 펴냈으며, 50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 평균 32km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60년동안 한번도 걸러본 적이 없이 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고 설교하였고 동생과 만든 수많은 찬송가중에 1778년에는 좋은 것만 뽑아 525곡의 커다란 찬송가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가 89세의 나이로 죽을때 두 개의 숟가락과하나의 찻 주전자, 그리고 다 낡아빠진 코트 한 벌밖에 없을 정도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었다. 그의 장례식이 있기 전날 그의 시신은 시티 로드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시신을 보기 위해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 왔고,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위대한 빛은(하나님의 보기 드문 섭리로 말미암아) 이 나라들을 비추기 위해 떠올랐다. 이 묘비를 읽는 이들이여, 하나님의 도구인 웨슬리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라면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감리교회의 창설자. 번째 아들로 출생. 어머니는 신앙과 성실성으로 웨슬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720년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했고, 1728년에는 성직자로 안수되었다. 1729-35년 옥스퍼드대학의 교수로 5년 동생 찰스와 함께 미국으로 선교하러 갔으나 8년 귀국했다. 선교기간의 경험을 통하여 모라비아 형제단으로부터 큰 영적 교훈을 받았고, 특히 인간의 노력으로 사람은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1738?시 모라비아 형제단의 집회에서 루터의<로마의 주석> 서문을 듣고 있다가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리스도만을 구주로 믿게되고,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성화도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을 확신했다.

이것을 웨슬리의 선생 또는 회심이라고 부른다. 이후부터 그는 잉글랜드. 스코트랜드. 아일랜드로 돌아다니면서 전도에 몰두하였고, 교회에서나 야외에서 매일같이 전도와 설교를 계속했다. 만 킬로 이상을 전도여행했고, 4만회 이상 설교했다. 웨슬리가 신생을 경험한 이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주장한 사상은 기독교인의 완전성이었다. 그는 이것을 모든 기독교인이 성취할 의무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죄의 용서를 받아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성령의 선한 열매를 맺을 때 그는 완전한 사람이 된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신학적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자 였지만 열정의 중요성을 주장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열광주의자라는 평을 받았다.

 

 

>> 목차고리 : 세계 > 유럽 > 영국

                    감리교

>> 참고고리 : 웨슬레의 생애와 신학,  찰스 웨슬리

>> 연결고리 : 감리회, 목사,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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