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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6
 제목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0. 5~1758. 3.22)
 주제어  [외국인] 청교도 노스햄프턴 회중교회목회자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제1장 청교도 조상과 어린 시절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의 이스트 윈저에서 아버지 티모시 에드워즈 목사와 어머니 에스더의 11자녀 중 5번 째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교도적 경건성이 있는 목사였고, 어머니도 노스햄프턴 회중교회 목사인 솔로몬 스토타드의 딸이었으므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청교도적 경건과 학문에 관심을 갖도록 훈련 받을 수 있었다. 11세 때 자연계와 곤충을 관찰하고 소논문을 쓰기도 했고, 12세에는 자신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확실히 조숙한 천재였다.


제2장 대학생활과 회심사건

1716년 13세가 되자 뉴헤이븐에 있는 예일 대학에 입학, 1720년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2년 더 그곳에 머물며 신학을 공부했고, 바로 그 2년은 에드워즈가 자신의 회심을 체험하였던 시기로 추정된다. 특별히 나의 대학 생활 2년 동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었다. 하나님은 나를 늑막염으로 붙잡으셨다---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1:17) 이 말씀을 읽을 때 마치 내 영혼 속으로 들어와 녹아서 퍼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더욱 거룩해지기를 열정적으로 갈망하였다. 그리하여 심령이 가득 차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어디에 있든지 거의 계속적으로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로 기도했다. 나는 매사에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형상을 닮기를 원하는 불타는 열망을 가졌다. 에드워즈는 1722년에 뉴욕에 있는 조그마한 장로교회에서 목회 현장을 실습한 후, 1723년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722-1723년 겨울에 자기의 마음과 생활을 통제하는 지침서가 되는 일련의 규칙들을 만든 결의문의 대부분을 썼다. 이 결의문은 그리스도인의 임무에 대한 최고의 요약집, 지금까지 사람이 만들 수 있었던 거 중 복음적 선행 실천에 대한 최고의 지침서로 평가되고 있다. 영적인 것이나 육적인 것이나 크고 작은 일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가능한 한 묵인하지도 아니하며 어떤 것도 행치 아니한다. 살아 숨쉬는 동안 전심전력하여 산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어떤 점에서 태만하였는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그리고 자신의 어떤 점을 부인하였는가를 생각하며 살핀다. 나는 자주 노인들에게 가서 다시 인생을 산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묻는다. 에드워즈는 1724년에 예일 대학 강사를 하며 학생들의 생애에 아주 좋은 감화를 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722년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는 그의 결의문과 함께 에드워즈의 인격과 신앙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다른 날보다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였다. 먹고, 마시며, 잠자는 것에 대해 금욕함으로써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욱 기운차고 건강한 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독교의 위대한 업적으로 말미암아 내 자신을 감화시고 애쓰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겠다. 이 일은 죽음의 자리에서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라. 쓸데없는 망상에 자로잡힐 때는 연구에 전념함으로써 견디고, 망상들을 떨쳐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에드워즈의 전기작가인 이언 머레이 씨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들도 꼭 같은 발자취를 따릅시다. 그리하면 분명히 꼭 같은 결과들을 얻게 될 것이다.


제3장 노스햄프턴 회중교회 목회와 일상 가정생활

1726년 13세 때 그의 외할아버지가 섬기고 있던 노스햄프턴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이때쯤 뉴잉글랜드의 신앙은 청교도 이주자들의 첫세대를 지도하였던 영적 거성들을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물질적 번영이 도덕성과 경건성을 혼미하게 하였으며, 저들의 영적 관심을 점차 빼앗아가 버렸다. 1720년에 인크리스 메더 박사는 뉴잉글랜드로부터 떠나가는 영광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18세기 초반 수년이 지났을 때에도 거의 변화가 없었다. 1731년 7월에 노스햄프턴의 에드워즈 목사가 보스톤의 대중집회에 초청받아 설교를 함으로써 널리 알려지며 에드워즈의 생애에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 특히 에드워즈의 알미니안 주의를 반박한 설교들이 부흥을 일으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에드워즈가 노스햄프턴에 미친 영향들을 상당히 컸다. 불과 반년 만에 300명 이상의 남녀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꼭 200가구로 구성된 노스햄프턴의 전체 주민이 각성하게 되었는데 이 역사는 실로 놀랄만한 것이었다. 그 불길이 뉴햄프셔주의 이끝에서 저끝까지 퍼져 갔으며 또한 커넥티컷주의 많은 지역으로 타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1735년에 노스햄프턴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소책자가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영적 대각성 보고서가 런던과 보스톤에서 발행되었다. 이에 대해 에드워즈의 전기 작가 드와이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사건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져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서 총체적인 회개를 일으켰으며, 복음 전파가 효과있게 수행되었는데 그것은 사도시대에 일어났던 것 이상으로 놀랄만한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뉴헤이븐에 살고 있던 사라 피어폰트와 결혼하여 30여년간의 무난한 가정 생활을 유지했으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에 한 번씩 아내와 합심하여 기도하였다. 에드워즈와 사라 사이에 11명의 자녀가 탄생했으며, 자녀들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하도록 훈련받았다. 저녁 식사 후에는 가족들과 약 1시간에 걸친 대화의 시간을 가졌던 에드워즈는 청교도적 경건을 자녀들에게 자상히 가르쳤다. 1749년 7월에 15세의 딸 마리아에게 쓴 편지에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라건대 너는 모든 시험을 물리쳐 자신을 엄격하고 단정하게 지켜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거나 잊지 않도록 특별히 은밀한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이렇다. 하나님의 선하심 속에 생명이 있고 세심한 사랑은 생명보다 더 귀하다. 네가 아프든지 건강하든지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 휘필드처럼 새벽 4시에는 기상했으며, 평균 13시간 정도를 서재에서 보냈다고 한다. 이 시간에 가족들이나 그의 교회 성도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 에드워즈는 종종 금식을 하면서 영성 개발과 자신의 신앙 상태를 점검했다.


제4장 영적 대각성

에드워즈가 목회하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영적 대각성이 일어났다. 먼저는 1734-1735년 노스햄프턴에 일어난 역사였고, 두 번째는 1740-1741년이었는데 이 때에는 뉴잉글랜드 전역에 걸쳐서 일어났다. 두 번째 대각성의 특징은 조지 휫필드와 사역했다는 점이다. 1740년에 보스톤의 여러 목사들이 휫필드를 뉴잉글랜드로 초청하였는데, 그렇게 방문한 것이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은것이 되었다. 휫필드와 에드워즈의 우정은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페리 밀러는 뉴잉글랜드에 대해 말하기를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미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휫필드는 폭발시켰다라고 했다.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교인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1741년 헷포어드에서는 27명이, 노오스 스토닝톤에서는 104명이, 보스톤의 올드사우스교회에서는 6개월만에 60명이, 같은 도시의 뉴오드교회에서는 12개월만에 102명이 늘었다. 1741-1742녕에 힝헴에서는 45명이, 플리머쓰에서는 84명이, 미들보로우에서는 174명이 늘어났다. 에드워즈는 이 해에 수 많은 설교를 하며 몸이 쇠약해졌다. 땅도 지옥도 그 어떤 것도 그 주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지역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는 다른 어떤 시대에도 보지 못했던 커다란 역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끼친 부흥의 영향력은 어떤 현대 비평가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조나단 피어슨은 1741년에 말하기를 수많은 영혼이 진노 가운데서 떨고 있을 때를 우리의 오순절이라고 했다. 이때 에드워즈가 부흥을 주도한 세 권의 책이 있는데 성령의 사역의 표적들을 분별함 1740년 뉴잉글랜드의 신앙부흥에 대한 소고 신앙의 열정이란 책을 남기게 만들었다.


제5장 노스햄프턴의 분쟁과 사직

1750년 6월 23일 에드워즈는 그가 24년간 사역해 온 자신의 교회로부터 축출당하게 된다. 이 사건의 발단은 에드워 교회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재력가의 아이들이 외설적인 책을 읽었는데 그가 이것을 꾸중함으로써 야기되었다. 에드워즈와 교회 평신도 지도자간의 갈등은 신학적으로 확대되어 결국 교회 정회원 230명이 에드워즈의 사임을 찬성하고 반대자는 오직 23명 뿐이었다. 에드워즈는 메사추세스 변경 지역인 스탁브리지 교회의 초청을 받고 이에 응한다. 말할 수 없는 경제적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한편 한적한 환경 속에서 그의 사상을 정리하여 그동안 밀쳐 두었던 대작들을 이곳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의 의지의 자유도 이 시기에 쓰여졌다.


제6장 프린스톤 신학교장과 죽음

1757년 9월에 에드워즈에게 가장 적합한 일이 부여되었다. 프린스톤 대학의 학장으로 선택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정 재능과 학식을 채 발휘하기도 전에 천연두로 인해 1758년 3월 22일에 사망한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들은 그가 살았던 생애를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임종을 지켜보는 딸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리고 두려워말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남겼다. 오랫동안 우리 사이에 있었던 신비한 연합은 내가 믿은 대로 영적인 성질의 것이었으므로 영원히 계속될 것이오 질병도 사인이었으나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고독한 목회가 노스햄스턴 교회로부터 입은 큰 상실감과 스탁브리지에서 했던 수고로 말미암아 지쳐 있던 에드워즈를 영원한 안식처로 초대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다. 칼빈주의자로서 에드워즈는 죽음까지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맡겼기에 평온한 임종을 맞이했다. 그의 아내도 6개월 후에 에드워즈의 뒤를 따랐다.


제7장 중요 작품과 신학사상

스탁브리지에서 6년은 가장 주목할 만한 문학 활동기였다. 1754년에 자유의지의 주요한 개념들에 대한 조심스럽고 면밀한 연구 그리고 1758년에에는 원죄 교리가 발행되었다. 첫 번째 책에서는 인간의 책임에 대한 성경적 교리가 확실하며,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의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알미니안주의적 교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논증하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원죄 교리는 모든 인간이 본성 가운데 죄 지을 수 있다. 이 성향은 아담의 죄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전 인류가 가담자로 여겨진다고 말하고 있다.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는 1734-1745년 겨울에 일어났던 잊을 수 없는 여러 사건들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놓았다. 신앙의 열정 이란 책에서 에드워즈는 말한다. 만약 우리가 신앙에 열심히 없고 우리의 의지와 기질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신앙의 열정이 거의 없는 사람들은 신앙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다.


제8장 에드워즈에 대한 종합 평가

첫째, 에드워즈의 공헌 - 그의 설교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열매들은 뉴잉글랜드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중 한 사람은 심판날에 대한 설교를 듣고 이렇게 표현했다. 에드워즈의 마음속에 묻혀 있는 감화력은 살아 움직이는 완벽한 것이었다. 에드워즈가 설교를 끝마치자마자 심파자가 내려오시고 최후 심판이 집행되는 것 같았다

둘째, 설교의 특징 - 강단에서 제스처, 스타일, 웅변은 거의 없었다. 키는 약 180cm 정도의 호리호리한 모습이었다. 거의 부동자세로 설교하였다. 적어도 생애 말기까지 자기 설교의 대부분을 써서 읽은 편이었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설교의 능력은 대단하였다. 스탁브리지에서 에드워즈가 사역할 당시 어린아이였던 한 사람이 자라서 다음과 같이 그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였다. 회중들은 2시간 이상 걸리는 설교 시간에도 움직이지 않고 똑바로 앉은 채 경청하였다. 진리가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중력으로 회중들의 마음을 압도하고 있었다. 거의 설교를 마칠 즈음에는 그렇게 빨리 끝마치는가 하여 다소 실망하는 듯하였다. 특히 에드워즈의 설교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그들이 받을 형벌에 있어서 무자비할 정도로 엄격하고 가혹하여 회심치 못한 사람들을 회심시키기에 적절하였다. 미국의 유명한 역사가 벤크로프트는 에드워즈가 자기의 시대에 끼친 영향을 이렇게 요약하여 말했다. 17세기 중반에 뉴잉글랜드들의 마음에 일어난 일들을 알고자 하며, 또 그 마음에 일어났던 진동들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하는 데 밤낮을 가려서는 안될 것이다.

셋째, 저서가 남긴 영향력 - 그의 작품들과 설교문들은 에드워즈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무수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부흥에 관한 그의 책들은 표준 교과서들이 되었다. 거기에는 사역자들과 신도들 모두에게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유사한 정도로 성령의 부으심이 있었으며, 현재에도 정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개방되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찰머즈 박사는 에드워즈에 대해 나는 오래 전부터 그를 존경하고 있습니다. 전례가 없을 정도의 심오한 지식가 경건을 잘 조화시킨 가장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넷째, 영력의 근원 -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엄숙한 임재의식 가운데 살았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동기가 되어 자기 훈련과 일찍 일어남으로써 시간을 벌었다. 은밀한 기도와 하나님 말씀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의 깊은 지식은 그의 경건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영원한 진리들로 말미암아 심오한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다섯째, 신학적 경향 - 청교도주의와 개혁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뉴톤과 존 로크와 같은 영국 철학과학자들의 논리와 접근법을 연구하고 응용하였다. 당대의 철학자들의 장점을 받아들이면서 내용적으로는 칼빈주의를 실질적으로 회복시키는 일을 미국에서 최초로 했던 신학자였다. 방법상에 있어서는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합리적인 설명을 해 내었다는 점이다. 에드워즈 신학은 칼빈주의 신학의 갱신이요, 회복이다. 부흥된 칼빈주의 신학이요, 살아 있는 교리신학이다.

여섯째, 시대와의 연관성 및 교훈 - 그러면 그의 삶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축복, 깊은 연구와 능력 있는 설교, 교리와 실제의 연결은 오늘날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들이다. 우리 조상들의 순수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으로 돌아가라는 요청은 에드워즈의 작품들이 우리 영혼에 남긴 최고의 교훈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성공은 진리와 기도에 대한 성공이지 숫자나 재능이나 활동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이 축복 받을 것이다. 그것이 깨달아지면 현재와 미래에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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