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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3
 제목  최용신(1909-1935) 양, 농촌계몽운동가
 주제어  [한국인] 천곡교회 상록수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 서론

최용신양은 1930년대 일제하 젊은 세대와 만인을 울린 천재 작가 심훈의 일생 일대의 대표작인 동시에,또한 그의 짧은 생애의 유작이기도 한 《상록수(常綠樹)》의 작중 여주인공의 실제 모델이었던 기독교 농촌 계몽운동의 선구자이다. 그는 1931년 온 겨레가 일제의 탄압 아래 자유와 인권을 유린 당하고 굶주림과 빈곤에 허덕이던 무렵, 샘골에 내려와 여기서 목숨을 바쳐가며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농민들을 깨우치는 사업으로 꽃봉오리 같은 그의 젊은 청춘을 모두 바쳤다.

2. 역사적 배경

때는 1930년대 초반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 살피어 볼 때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점령한 후인 1920년대는 일본의 전 통치기간으로 볼때 제2기(1920-1930)에 속하는 기간으로써, 소위문화정치시대라 말한다. 일본은 1919년 거족적으로 민족독립운동이 발발하자. 그간의 통치가 실패였음을 자인하고, 소위 문화정치라는 새로운 간판을 내걸고 정치를 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문화정치란 그 표면에 내세운 아름다운 어휘와는 달리, 그속에 가리워진 기만성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아왔는데 훗날 역사가들은 문화정치란 그 본질에 있어서,그때까지 무단정치와는 조금도 다름이 없는 정치라고 단죄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의 거칠었던 통치방식을 더욱 세련된 통치방식으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때까지와 같은 적나라한 군사적 지배를 계속하고 있으며 내외의 반박 비난이 들끓게 돼서 조선지배 그 자체가 위태롭게 된다는 정세 아래 택한 우회 전술"이다. "조선인을 묶고 짓누르며 옭매는 체제, 채찍을 실질적으로 한층 더 강화한" 지금까지와 아무런 변함이 없는 "허위와 기만에 찬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일제의 악랄하고도 고단수적인 정책에 따라 1920년대 후반에 가서는 한국의 전반적인 상황은 질식할 정도의,상태에 있었다.

3. 최용신양의 변모

이러한 절박한 때에 우리 민족을 사랑하셔서 한 일군을 주셨으니 그가 바로 농촌의 계몽 운동의 선구자인 최용신양이다. 그는 1909년 8월에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명문 가문 최상희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리고 1928년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감리교여자협성신학교 본과에 입학하였다. 최용신양의 농촌운동의 불꽃은 그의 원산 루씨 여학교시절부터 불붙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농촌운동에 대한 불타는 염원을 더욱 뜨겁게 한 것은 협성신학교에 입학함으로 부터이다. 그것은 협성신학교에서 유명한 선생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인데,그가 바로 독립운동가요 농촌운동가인 황에스더 (黃愛德 또는 黃愛施德 1892-1971)선생이다.

1929년 여름방학이 되자,황에스더 선생의 지도에 따라 김노득 양과 함께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로 실습겸 농촌 계몽운동을 위해 떠났다. 최용신양은 이 첫 임지에서 좋은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 3개월 있는 동안 많은 경험을 쌓았다. 1930년에는 경상북도 포항읍 옥마동으로 갔는데, 여기서는 용현리의 실패를 거울삼아 일했기 때문에 짧은 기간이었지만 주민들에게 사랑을 받고 성과있게 일하고 돌아왔다. 1931년 10월에는 세번째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샘골)으로 파송되어 갔다. 여기서 그는 전임자 장명덕(1901-) 전도사가 시작한 학원을 이어받아 한 5년간을 일했는데, 그 어느 곳에서 보다 더 큰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뜻을 다 이루지 못한채 병을 얻어 1935년 1월 23일 26세의 꽃다운 생을 마치었다.

4. 천곡교회의 형편

그가 마지막으로 일한 천곡교회는 현재 위치상으로는 수원에서 인천쪽으로 고속도로 16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반월공단 안에 있다. 그리고 교회 구역상으로는 중부연회 반월지방에 속하고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천곡교회는 1907년 홍원삼,홍순호(목사)형제에 의해서 시작되었고,지금 79년의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과거 최용신양이 천곡으로 부임할 때는 1920년대 초부터 한참 부흥하기 시작하여 정상을 오를만큼 크게 부흥되었던 때이다. 안산구역 가운데서도 무지내교회 다음으로 두번째로 큰 교회로서 초가 교회당과 두개의 주택을 가지고 있었으며 30여호 되는 동리가 한 두집 빼놓고는 모두 기독교를 신봉하였다.

그후 1931년에 최용신양이 부임하여 학원을 개원하고 학생을 모집하여 가르치며 언덕바지에다 건물을 건축하자 이제는 안산구역에서 제일가는 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1934년에는 안산 구역을 안산 동,서구역으로 나누고 천곡은 안산동구역 중심교회로 목사를 모시게 되었다. 그후 이 교회는 전재풍 목사(1934-1937,1939-1954).이천국 목사(1937-1939) 이군석 목사(1954-1968),이기덕 목사(1968-1975).김진춘 목사(1975-1981),백만국 목사(1981-) 를 모시었다. 그리고 농촌 굴지의 교회로써 온 동리가 기독교화한 교회, 향학열이 높은 교회,목회자가 오래 목회하는 교회로써 이름이 나 있다.

5. 최용신양 기념사업

최용신양이 1935년에 소천한 다음 1970년까지 35년간은 천곡교회가 그의 학원사업의 명맥을 이어 내려왔다. 그러나 1971년 이후에는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으로 그 사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애석하게도 완전히 문을 닫고 말았다. 그후 루씨 동창회가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1974년에 기념비를 세웠고, 1976년에는 옛날 최용신양이 학원을 세웠던 자리에 있었던 낡은 교회당을 헐고 상록회관을 세우고 오늘까지 그 자리에서 유아원을 경영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여성 단체협의회는 1964년 [용신 봉사상]을 제정한 이래 금년까지 20회 수상식을 거행하고 있다.

6. 농촌운동의 특징

이제 끝으로 그의 농촌운동의 특징을 살피어보면, 그의 운동은 조선일보나 동아일보가 주창했던 계몽운동과는 차이가 있다. 이 말은 그가 애국적인 아니었다든지 문자를 가르치지 아니했다든지 하는 말이 아니라 그는 기독교인으로써 더구나 신학생으로 한 운동이었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의 특이한 점이 있다. 즉 그는 한마디로 말해서 기독교 계몽운동가였다.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리며 기도하는 농촌 계몽운동이었다.

또 그의 농촌운동은 한두 주간에 끝나는 단기적인 운동이 아니다. 당시의 신문사가 주동이 되었던 운동은 여름방학 동안만이었다. 그 기간 동안 가서 겨우 한글이나 깨우치고 돌아왔는데,최용신양은 아주 짐을 싸가지고 가서 함께 자고 먹고 일하면서 강습소를 짓고 몇해를 두고 영구적으로 벌인 운동이었다.

또 그의 농촌운동은 문맹퇴치교육에 주안점이 있는 것이아니라 사람을 기르는 데 주 목적이 있었다. 목축업을 하던 유지를 찾아가서 "짐승을 기르는 것보다 사람을 기르는 것이 더 낫다"는 말로 설득을 했는데,이것이 당시의 문맹퇴치운동과 다른 점이다. 그의 운동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교육이 아니었다. 그것은 애국자들의 독립을 목적으로 한 수단도 아니며 더군다나 일제 통치자들의 전쟁수행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 또한 현실로 돌아와서 현 농촌의 무지와 빈곤에서의 해방을 위해 우선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도 잇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배운 지성인들이 탁상공론만 하지말고 실제로 농촌으로 뛰어 들어가 일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높은 이상의 소유자인 동시에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과감하게 뛰어든 실천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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