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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3
 제목  정인태(鄭仁泰, 1917-1950) 목사
 주제어  [한국인 목사, 순교자]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신앙으로 민족혼을 일깨운 죄로 순교

[1917-1950 순교자 전남 함평 출생]

1.부친의 뒤를 이어 강단을 맡아.

1917년 전라남도 함평 지방에서 전도사인 정재련과 김장산부부 사이에서 차남으로 정인태가 태어났다. 그는 장성해가면서 매사에 침착하면서 대담한 남자다운 성격을 지녔다.

 

그는 교회 안에서 야학을 시작하여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과 부녀자를 상대로 밤마다 한글을 가르치는 한편 성경과 찬송을 가르치며 불러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일제는 이를 금하고 있었다. 일제는 언어 말살정책으로 각급학교에 명령을 내리고 가르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일상생활에서마저 한글을 쓰거나 국어를 말하면 딱지같은 종이를 나눠주고 위반하면 하나씩 떼어내고 그 수가 적어질 때마다 벌을 가하였다. 그러나 함평군 가덕교회에서는 오히려 이것을 가르쳤고 성경을 한글로 읽고 찬송을 우리말로 노래하는 것은 물론 국사까지 가르쳤으니 일제에게 있어서는 일급 범법자들이 아닐 수 없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부친 정재련 전도사가 현재 옥중생활의 고난을 치르고 있는데 정인태는 이를 더욱 강하게 추진해 나갔고 교회 일도 부친을 대신하여 돌보는 한편 설교와 기도회를 이끌어갔다. 기회있을 때마다 옥중에 계시는 부친을 찾았고 기도하는 교회의 소식을 전했고 아버지께로 말씀을 받아왔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가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이 말씀을 명심하여 지켜 갔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강단을 지키는 한편 국사를 배우던 마을 청년을 중심으로 [애국청년단]을 조직하고 지도해 나갔다.[애국청년단]은 장차 향토를 지키는 자위대 역할을 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도 종전을 고하고 일제는 패망했으며 조국은 광복되었다. 부친은 출옥했고, [애국청년단]은 창단 목적을 잘 발휘해 나갔다.

2. 일사각오로 십자가만을 지기로 서약

정인태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서울 동자동에 있는 조선 신학교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의 신학수업을 마치고 전북 정읍지방 교회를 담임하여 목회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에 전남 무안군 몽탄지방의 몽탄교회에 부임하여 1950년 4월달에 목포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안수받던 날 정목사는 일사각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지기로 서약하는 기도를 올렸다.

 

그때부터 두달 뒤에 6.25가 터졌다. 제대로 방어도 못한 채 당하기만 하면서 남한일대를 거의 공산군에세 내어주게 된 것은 이곳 몽탄도 마찬가지였다. 그해 7월 23일은 주일이었다. 목포에서 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이 돌아왔고,갑자기 오싹 냉기가 도는 듯한 불안한 분위기는 아침 일찌기 예배를 드리러 모인 교인들에게서도 읽을 수가 있었다. 정 목사는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이런 때일수록 침착하게 대처하자고 당부한 후에 교인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정목사는 종이 깨어지라고 힘껏 치면서 속으로 이 세상에 마지막 치는 종이 될른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다 . 교인들은 어느 때보다 더 빨리 많이 모였다. 정 목사는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계속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갔을까.'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도다' 찬송으로 예배는 시작되었다. 정목사의 기도는 그 어느 때보다 모든 성도들에게 용기를 더해주는 기도였고 말씀 또한 그러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는 아무 일이 없었다. 돌아가는 교인들의 손을 일일이 붙잡고 부디 무사하고 믿음 안에서 평강을 비는 듯 굳은 악수를 하였다.

 

여름 한낮 해도 어느덧 비껴가고 땅거미 드는 저녁무렵 저녁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려고 막 문을 열고 나서는데 낯선 청년 두 사람이 앞을 가로질렀다. 당신이 목사냐고 묻고 자기네는 해방군인데 교회를 저희 막사로 쓸 터이니 그리 알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이 건물에 출입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오륙십명 가량의 해방군이라는 사람들이 몰려 왔다. 정 목사에게 있어서 마지막 예배가 될 것이라곤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3. 신앙으로 민족혼을 일깨운 죄로 죽창에...

교인들은 자기들 걱정보다는 목사님을 걱정해 속히 몸을 피해야 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불안한 근심을 목사님이 좀 덜어달라는 소원들이었다. 그래서 바닷가의 조그마한 굴이 있었는데 몸 하나 우선 피할만한 곳이었다.마음이 허락지 않으나 교인들의 간청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계속하여 머무를 곳은 못되었다. 생각다 못해서 간들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생각한 곳이 어린 시절의 고향이기도 하고 지금은 처갓집이 있는 함평군 가덕으로 가리라고 작정하고 식구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간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어린 시절 소꿉 친구들이 있는 곳이니 가장 안전하게 감싸주리라고 생각한 것부터 잘못이었다. 너무나 자기가 누군가를 잘 알고 있는 그 친구들 손에 잡혀서 신광 내무서로 연행되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팔에 완장을 두른 사람들이 내무서 뒤뜰로 나왔다. 정 목사는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하나님! 이 민족의 죄를 언제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깁니다."

 

완장을 두른 청년의 팔에 정치 보위부라고 쓴 완장이었다. 이 정치보위부원이라는 자가 '여러분 이제부터 정인태에 대한 인민재판을 이곳에서 개정합니다." 앞에 서 있던 자들이 기계적으로 박수를 치며 외쳤다. "반동 분자는 죽여라! "이것이 재판의 전부였고 인민의 이름을 팔아 이미 저희 계획대로 1분도 못되어서, 끝나고 유치장에 구금되어 집행만 기다리게 되었다. 어추구니 없는 죽음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탙출이다. 1950년 10월 10일 허술한 경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하였다.

목사는 필사의 걸음으로 불갑산 속 굴 속으로 들어가 겨우 저희 눈을 피했다. 추위와 굶주림을 참고 견뎌야만 했다. 시편 54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였다.그러나 퇴각선이 유엔군의 인천 상륙전의 성공으로 찬단된 인민군은 이리저리 뛰는데 이곳 불갑산 쪽으로 몰려왔다. 찬송하며 기도하는 소리에 달려온 쫓기는 무리에게 발각되어 그 무리 속에는 어릴 때 친구도 있었으나 이 때문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찬송을 부르면서 죽창으로 난자당하는 상처마다 피를 쏟으면서 10월 24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번개 천둥 속에 억수처럼 2시간이나 비를 쏟아 피를 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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