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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3
 제목  이승길(1887-1965) 목사
 주제어  [한국인 목사] 인천제2교회 인천제이교회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 성장과 입교

이승길목사는 1887년 7월 13일 황해도 황주군 구성면 서정리에 출생했다. 1894년부터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896년 이길함 선교사에의해 구성면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그는 부모를 따라 교회에 처음 출석했다.

그후 15세때인 1901년 한위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같은해 3년제 소학교인 황주 양성학교를 졸업, 평양숭실학교를 입학했다. 평양에서 기숙사생활을 하며 마포삼열, 윤온산, 이길함, 한위렴 선교사들로부터 기독교교육과 아울러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정신을 배웠다.

2. 교육구국과 독립운동

1905년 숭실학교를 졸업한 그는 젊고 패기 넘치는 나이인 19살에 교사로서의 길을 선택했다. 그가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고자 했던 이유는 당시의 시대적 불행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교육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부임한 학교는 사리원 광성교회 부속 광성소학교였다. 광성소학교는 거의 남학생으로서 연령층은 여섯살 어린아이에서부터 결혼한 어른들까지 그 계층이 다양했다. 총학생수는 약 300명에 이르렀다.

 

그는 교육구국의 일념으로 후진들을 양성하면서 학생들에게 학문뿐만 아니라 나라사랑의 마음을 길러주려고 노력했다. 또한 이승길 목사는 낮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소 밤이 되면 이집 저집을 방문하여 사상교육과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일을 하였다.

 

한편 방학이 되면 상경하여 상동감리교회의 전덕기목사를 중심으로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08년에는 김구, 최광옥,도인권,김홍량 등과 함께 해서 교육총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렇게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길은 국치의 비극 한일합방을 맞는다.

그해 이승길은 김구 김홍량등과 더불어 이른바 [안명근사건]에 연루되어 15년의 실형을 언도받았으나 수감 중 7년이 감형되어 8년동안 황 금같은 점은 시절을 해주 형부소와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전전하면서 보낸다.

3. 목회활동

출옥 후 이승길은 1921년에 사리원 광성리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았다. 장로장립을 받은 그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남은 생애를 주님께 헌신하기로 결김한다.

그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열심히 읽었고 또 기도와 경건의 생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8여년의 옥고를 치르면서 성경을 통해 맡은 많은 은혜와 뜨거운 체험이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23년 평양신학교를 제17회로 졸업한 그는 그해 12월 제25회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26년 황해도 회장에 피선되었고 1930년 부터 10년간 장연읍교회에서 시무하였는데 이 기간 중인 1935년 평양노회장, 1936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5회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1937년 평양노회장에 재선되었다.

4. 신사참배와 정방산 사건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그는 신사참배는 성경말씀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섰다.그러나 일본의 회유책에 의해 신앙적 변절을 가져왔다.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결의됨으로써 평양신학교가 자진 폐교된 후 이승길은 설립자 대표로 신학교복구운동에 앞장선다.

1940년 겸이포 중앙교회를 담임했다. 1948년까지 근속하면서 1941년-42년 황동노회장으로 활약했고 1944년 정방산사건으로 피검되었다.

정방산사건은 황주군에서 목회하는 목사, 전도사들이 정방산에서 독립운동모임 결성을 결의하고 의장에 이승길목사, 서기에 박경구목사등을 선임하여 모임을 조직하다 일본 경찰과 헌병에 발각되어 정방산에 모인 교역자 모두가 체포 투옥된 사건으로 이 목사는 이 사건으로 1년여간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과 함께 출감하였다.

5. 해방과 전도활동

8.15해방이 되자 1948년 월남한 이승길 목사는 토마스 목사를 기념하기 위해 [토마스 목사 기념전도회]를 조직하여 옹진, 연백 등지에 개척전도를 했다. 약 2년여동안 14개교회를 개척하고 교회건물까지 건축 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해 나가는데 쉽지만은 않았다. 어떤 곳에서는 미신타파를 위해 성황당과 신당에 불을 지른 적이 있었다.그러자 미신 숭배자들이 몰려와 돌을 던지며 핍박하였고 어떤 마을에서는 쉴곳을 찾이 못해 노숙하는일도 있었다.

6. 인천제2교회 개척

1949년 황남노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에 피선되었다. 1951년 9월부터 인천제2교회를 개척하여 작고시까지 시무하였다. 이목사는 인천제2교회를 개척하고 열심히 목회를 한결과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특히 회갑이 넘은 이목사는 자신의 마지막 목회임을 깨닫고 최선의 목회가 되도록 정성을 들였다. 그결과 1`5년동안의 목회로 인천제2교회는 철저한 신앙안에서 천여명이 모이는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한편 1952년 기독교봉사회 한국지부중앙위원, 1953년 세브란스의과대학 재단이사 등을 역임하였고 같은해 마르다 모자원을 설립하였다. 1954년 황남노회장에 재선되었고 1957년 11월 1일 인천제2교회에서 성역 41주년 기념식을 가졌으며 1962년 9월 22일 제50회 예장총회에서 증경총회장으로 추대되었다.

7. 소천

1964년 이목사는 성찬을 앞두고 노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러다 1965년 1월 말에는 인천기독교병원에서 수술을 했지만 치료에 별효과가 없자 곧 퇴원했다.

한편 이 목사는 병상에서도 한국교회를 염려했다. 특히 80년의 역사를 가진 장로교회가 분열된 것에 안타까움을 표시하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건강을 다시 주신다면 교회통합운동을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길 목사는 1965년 2월 18일 79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장례는 인천제2교회 예배당에서 5일장으로 치러졌다.
1977년 12월 13일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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