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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3
 제목  배춘근(1923. ?~1950. 7. ?) 전도사
 주제어  [한국인 순교자] [소래교회] [대한민국] [전도사] [순교자]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923년 황해도 장연 배일구의 막내로 출생하여 1947년 봄 단신 월남하여 서울신학교를 졸업하고 중앙성결교회에 시무 중 1950년 7월, 28세에 공산당에 체포되어 총살 순교하였다.  

1. 일제의 압제속에서 더욱 교회를 잘 섬겨

한국 최초의 교회 소래교회를 세워 기독교 복음을 이 민족 가슴에 심어준 어머니 교회의 소재인 황해도 장연군에 흥해 배씨 가문 원구씨의 9남매 중의 막내 아들로 배춘근은 태어났다.

그러나, 위로 7남매가 차례로 원인 모를 병으로 죽어나가는 터에 무슨 일인들 안 해본 일이 있었겠는가?굿도 하고 삼재를 막을 방법도 써보았다. 그러나, 다 소용없는 일들이었다. 그런데, 소래 김판서 손부인 안성은이 장연군 일대에 열성있는 복음전도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녀는 안중근 의사와 안창호를 배출한 순흥 안씨 가문의 딸로서 해안면에 취락을 이루는 사고 200세대의 안시촌에 복음을 들고 나아갔다. 유교적 폐습 때문에 주로 아낙네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는데,길삼,김매기,또는 그때는 장을 보러가도 걸어서 다녔기 때문에 먼 길의 말동무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며 무엇이든지 사양치 않고 나섰던 안씨 전도부인을 춘근의 할머니가 만났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예수당에 나가면 삼재(三災)를 면하고 큰 축복까지 받을 수 있다는 열렬한 전도에 그 날에 이 배씨 가문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끝으로 춘근이를 붙들었다. 춘근은 천성이 어질고 착해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자 같았다.

부흥사경회를 비롯해 19살짜리 어린 총각집사는 연합사업에도 복음사업에도 빠진 데가 없이 열심을 냈다. 이러는데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불운은 아버지의 별세였다. 게다가 일제는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고 전국이 전시체제로 돌입하며 강제노동 동원의 육신적 고통에다가 내선일체를 표방 창씨개명을 강요하였고 신사참배에다가 동방요배를 엄명하여 정신적 고통을 가했다. 그러나 교회는 이를 거부하여 많은 주의 종들이 투옥되었다. 춘근은 19살의 집사로서 이 어려운 때에 더욱 교회를 잘 섬겨야 되겠다고 사찰집사 이상으로 섬기며 돌보았다.

그러던 중에 이웃의 해안면 안두일 집사의 과년한 딸과 결혼했다. 이렇게 하여 안보석의 남편이 된 배 집사는 금방 맞이해 놓은 색시를 두고 집회나 복음 사업에 하루가 멀다고 나섰다.

이리하여 1944년 가을이 접어 들자 세계대전은 폐색이 짙어만 가고 일제의 최후의 발악은 식민지 조선에 징병과 징용제도를 적용 조선청년들을 일선에 투입하던 때에 춘근에게 바로 이 영장이 떨어졌다. 이리하여 그는 징집되어 갔고 훈련 중에 첫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편지로만 받아 알게 되었다. 드디어 새해인 1945년에 이르러 전쟁은 일본의 불리한 쪽으로 기울다가 마침내 진해에서 훈련을 받는 중에 해방을 맞고 9월에서야 나는 듯 귀향했다.

2.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겨야 겠다고 결심

그러나 기대와는 반대로 과거 일제보다 더 열악한 지옥을 구축하고 있던 것은 공산당 패거리들이었다. 해방의 기쁨은 커녕 날로 심해지는 로스케들의 약탈과 횡포,여성 겁탈로 이에 힘입은 조선공산당의 위협적인 거센 물결은 차차 교회 쪽으로 기울어져만 갔다. 이러는 판국에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는 중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내가 목사가 되어 주의 교회를 받을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미치자 밤마다 교회 마루바닥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목사 공부를 하자면 신학을 해야 하는데 어느 신학을 할 것인가? 그 때 평양에는 그동안 닫혔던 신학의 문을 열고 전통을 계승하기 위하여 김인준 박사를 교장으로 하는 평양장로회신학교가 열려 있었다. 한편 서울에는 벌써 일제말기읜 1941년부터 조선신학교과 당국의 허가를 받아 학생을 배출하고 있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배 집사는 아무래도 지속적이고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데도 평양보다는 서울 쪽을 택해 조선신학교에 입학해야겠다는 생각에 1946년에 남으로 떠나는 틈에 끼어 사고무친한 서울에 왔으나 총회직영 신학교에 입학을 하자면 성경학교 정도라도 나와야 하는데 배 집사는 그렇지를 못했다.

그래서 입학이 가능한 경성신학교에 입학하여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한 나머지 그가 졸업하던 1950년까지 소식을 끊고 한 가지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음악적 소질이 있어 학창시절에는 "경신코러스"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춘근은 6.25가 발발하던 그 해 졸업을 하고 5월 30일에 임지인 부평, 소사의 중앙교회에 초빙되어 열심히 전도하고 심방하여 교인들과 하나가 되어 존경을 한몸에 받으면서 성공적인 목회를 펼쳐 나갔다.

3. 어린양의 고통을 보고 이를 구하려다 공산당의 모진 고문속에 순교

음악적인 소질로 청년들과 함께 성가대를 은혜롭게 이끌어가는 등 처녀목회에 헌신을 다하고 있을 때에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6.25는 발발되었다. 기습적인 저들의 남침으로 사태수습의 여유도 없이 서울을 사흘만에 내어 주어야 했던 이 참극은 이곳 부평에도 일주일만에 몰아닥쳤다. 젊은이들은 피난을 떠나고 미처 못떠난 부인들과 노인들이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래서, 동리에서 조금 떨어진 산에 가서 교인들과 함께 피난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기를 1주일을 지나면서 하루 이틀에 끝날 전쟁도 아니고 해서 야밤중에 산에서 내려왔다. 이 장로댁체서 하루밤을 쉬고 이튿날 아침에 보았더니 교회가 이미 제단 벽에 김일성 사진과 붉은 기가 꽂히고 무신론자들의 사무소로 변해 있었다.

이때에 유치원 보모 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갔다가 그들에게 붙잡혔다.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소름끼치는 비명에 고문받는 어린 양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뛰어들려는 전도사를 이 장로가 붙잡고 안된다는 것이다. 잡히면 저 보모의 유겠는가. 안된다는 것을 굳이 뿌리치고 그는 교회당을 향하여 나섰다. 이내 저희들에게 잡혔고 이 교회전도사라는 것도 다 말했다. 이제는 더 살아날 소망은 없고 전도사는 할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여러분은 남조선을 해방한다는 의의 기치를 들었다면 신성한 하나님의 교회를 징발하여 예배행위를 방해하는 것은 절대 잘한 것이 아니요.민족의 양심이요, 교육의 도장인데 이렇게 마구 구둣발로 짓밟는 것이 이해가 가지를 않소"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배 전도사가 월남민인 것을 알고 그간의 한일을 심문하고서 미제국주의의 방조자요, 인민의 적으로 몰아 온종일 심문을 계속하다가 어둠의 장막이 검은 날개를 내려덮는 듯한 밤이 오자 귓속말로 주고 받더니 배 전도사를 끌고 산으로 올라간 얼마후에 두 발의 총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었다. 이후 어둠은 계속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깊어만 갔다. 날이 밝아오자 이 장로와 교인들의 순교자를 안장하려고 올라갔을 때는 기도하는 자세로 굳어져 있는 시신을 입은 옷 그대로 눈물로 매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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