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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인명사전  작성일  2006-12-23
 제목  구연영(1865-1907) 의병출신 민족운동가, 순교자
 주제어  [한국인] 의병운동 구춘경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의병출신 민족운동가, 순교자


1.출생과 초기 의병운동

호는 춘경,그래서 미국 선교사들의 기록엔 "구춘경"(Ku Chun-Kyeng)으로 나온다. 1865년 6월 20일 서울에서 구철조의 3남으로 출생.본관은 능성인데 그의 가문은 도원수파로서 전통적 무가였다.

어릴 때의 성장기록은 없으나 한문 수학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짐작되며 18세 전에 변씨(후에 세례받고 美禮란 이름을 얻음)와 결혼하여 네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정서(1883년생),둘째가 성서(1894년생),그 밑으로 완서(1898년생)와 종서(1902년생)가 있었다.

 

20여세때 선향인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궁평리에 정착하여 10여년 가업에 종사하면서 당시 서울에 있던 김하락,김태원,신용희,조성학 등을 비롯하여 이천에 있던 화포군 도영장 방춘식 등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그가 30세가 되던 1895년 6월 민비가 시해당한 사건이 일어났고 그해 11월 15일 단발령이 공포되자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척사위정"을 외치며 의병을 조직,무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경기도 의병은 이천이 중심이 되어 남한산성을 점거,제천의 유인석 의병과 함께 중부지역 의병운동을 주장하였는데 이 이천의병의 주동 인물로는 구연영,김하락,김태원,조성학,신용희 등으로서 무반가문 출신의 구연영이 중군장으로 핵심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2. 의병운동

이천의병의 첫 전투는 1896년 1월 18일에 치루어졌다. 의병진에서는 복병계를 쓰기로 하고 길목인 넋고개에 매복해 있다가 적군을 습격,광주 노루목까지 추격해 패퇴시켰다.

이천의병을 얕보다가 크게 패한 일본군은 군세를 대폭 늘여 2월 12일 새벽 이천을 기습하였다.구연영은 이현 동구를 지키며 분전하였으나 우세한 화력을 갖춘 일본군 수비대에 밀려 2일간의 전투는 의병측 패전으로 끝났다. 구연영은 원주로 피신,그곳에서 다시 새로이 의병을 모집하여 20여일만에 이천에 귀환하였다.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패배를 맛본 의병들은 진지를 광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그러나 진지를 남한산성으로 옮긴 의병군은 관군측의 이간책에 넘어간 김귀성과 박준영의 배신으로 인해 1896년 3월 22일 남한산성에서 퇴각하고 말았다.

재기불능 상태에 빠진 의병들은 다시 김하락을 중심으로 구연영,신용희.김태원 등 모여 김하락의 고향인 경상도로 옮겨 그곳에서 모병한 후 다시 북상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여주,단양,안동,의성등을 거쳐 의횽 압곡사에 진을 쳤고 여기에 안동지방 의병과 충청도에서 내려와 안동에 자리잡은 서상렬의병과 연합작전을 펴 강북지방이 을미 의병의 주요 활동지로 변하게 되었다.

 

이곳에서의 첫 전투는 5월 14일에 있었고 이 전투는 비봉산으로 옮겨져 10여일에 걸친 전투끝에 의병들은 계속 후퇴하여 지동점에까지 밀렸다. 이에 세불리를 절감한 구연영은 자기를 따르던 경기도 출신 의병 30여명을 거느리고 회군하게 된다.

이때가 1896년 5월 27일 그가 김하락과 함께 한강을 건너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킨지 6개월 만에 다시 고향인 광주로 귀향하였으며 구연영은 고향에 첩거하면서 6개월동안 자신의 투쟁과 사상을 정리한 후 1897년 2월,서울 남대문 안 상동교회의 스크랜톤을 찾아간다.

3. 기독교를 선택한 구연영

훗날 구연영과 사돈관계를 맺게되는 원용한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그는 누구의 전도도 받지 않고 1897년 2월 상동교회로 스크랜톤을 스스로 찾아가 기독교인이 되었고 교인이 된후 먼저 집안에서 양반,상인의 신분적 구별을 철폐하는 등 혁신적인 행동을 취하였으며 대중 전도인으로 개인과 민족의 살길이 신앙에 있음을 외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기독교계에의 개종에서부터 전도인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속에는 오랜 고민과 시험을 거친 결단이 있었음을 밝힐 필요가 있다.

 

먼저 그의 입신의 동기는 무엇일까?구연영이 6개월 공백기를 거친 후 스스로 기독교계의 입신을 결단하게 된 데는 단순한 신앙적 결단이라기 보다는 신앙외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의병운동을 통한 민족구원의 의지가 좌절된 후 귀향한 그에게 새로운 힘의 정체로 접근한 것이 기독교였다. 1894년 동학란 이후 청일전쟁,의병난리로 겪으면서 민중은 많은 시련을 겪게 되었는데 그 피난처의 하나로 교회가 등장하였다.

 

선교사를 배경으로 한 기독교는 동학도,청.일 양국 군대도,조선 정부도 침범할 수 없는 치외법권적인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민중의 눈에 비치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1895-1896년 피난가는 일반인들까지도 자기 재산을 교회에 맡길 정도로 교회는 민중의 보호기능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결국 생활 보호수단의 동기에 의한 기독교 입신 증가라는 결과를 빚었다. 실제 감리교의 경우 1895년 당시 교인수가 9백56명이었던 것이 1897년에는 2년 사이에 2천8백88명으로 3배의 증가를 보이고 있다.

구연영이 자진하여 상동교회 스크랜톤을 찾은 동기를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그가 입신한 후 선교사들은 3년이나 있다가 그에게 세례를 주고 정식 교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십자가에 의한 구속의 은총을 강조하는 선교사들과 교회를 민족운동의 매개체로 삼으려는 구연영 사이의 갈등은 3년 동안의 매서인 활동과 상동교회 전덕기(당시속장)을 중심한 "엡윗청년회"활동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

4. 민중 전도인

구연영은 엡윗청년회를 통해 인본주의적 사회체제를 습득했으며 다른 동년배 민족운동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민족의식을 형성할 수 있었다. 새로운 민족의식이란 주권재민의 민주적 민족의식을 말한다. 이같은 의식변화에 의해 그는 집으로 내려가 당시 양반으로서는 할 수 없는 파격적인 행위를 취하였고 이로 인해 동문에서 추방당해 스스로 개척의 길을 걸어야 했다.

 

덕뜰에 정착해 살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새 삶을 살기 시작한 그는 1899년 3월 덕뜰에서 세례를 받았고 세례를 받은 후 정식으로 매서인이 되어 광주,이천,여주,장호원 지역을 다니며 성서,교리서를 팔면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이무렵 그는 과거 의병 동지였던 차화춘,전무호등을 권유하여 기독교인이 되게 한후 함께 광주,이천 지역을 돌며 전도하여 곳곳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즉 덕뜰을 효시로 궁뜰,노루목,오천,오향 등지에 교회가 속속 설립되어 1902년 이천 계삭회가 설립될 당시 이천,광주,여주 지역 내엔 24개교회,1천92명의 신도(어린이 제외)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처럼 눈에 띄는 교회의 설립 및 교인수 증가 외에도 구연영의 내적 변화가 전도인으로서의 체험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구연영은 있어 전도인의 체험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민중체험"이었다. 그리하여 전도인 체험을 통해 그는 민중구원이 곧 민족운동의 기본임을 깨닫게 되었고 전도인으로서의 삶에 헌신하려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비로서 기독교에의 개종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무렵 그는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적 신앙 3대 원칙을 세우게 된다. "신(信)은 진실한 신념으로 상제를 신봉하고 기독의 교훈으로 죄과를 회개하고 진리의 삶으로써 완전한 인간의 기초로 삼자 함이요.

망(望)은 확고한 소망을 가지고 관존민비 의타사상 직업차별 미신허례 등 악풍폐습 타파개선하며 신교육을 흡수하여 현실만에 낙심말고 직업에 충실함이요.
애(愛)는 진정한 애의 정신으로 경천애인을 표어로 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며 조국을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며 정의로 단결하여 모르는 사람을 깨우치는 것이 조국광복의 기초라"(춘경 구연영선생 략전,독립혈사 권지이,179면).

5. 순국

1895년 11월에서 1896년 5월까지 6개월 간의 의병운동,1896년 5월부터 1897년 2월까지의 은둔기간, 1897년 2월부터 1899년 3월까지의 견습기간,1899년 3월 세례받은 후 3년간의 매서인 활동기간을 거치면서 의병장 구연영은 전도인 구연영이 되었고 척사위정을 신봉했던 유생에서 민중구원을 선포하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민족운동의 한 방편으로 그가 선택했던 기독교는 오히려 이제 그를 전도인으로 선택하여 보다 철저한 봉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성실성으로 선교사들의 신임을 받기에 이르른 그는 1902년 미감리회 조선매년회에서 권사직분을 받게 되었다. 당시에 권사는 평신도로서 지역 교회를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로써 구연영의 교회 지도권은 확립되었다. 이무렵 그는 이천읍내로 이주하여 이천구역 24개 교회를 돌보는 책임을 맡게 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정서(호는 興國)도 권사가 되어 父子가 함께 이천.광주지역 교회를 돌보았다.

 

매년 2회 서울,인천,강화,평양 등지에서 개최되는 신학회를 통해 목회자의 자격을 구비하게 된 구연영은 1905년 정식 전도사 칭호를 받게된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이제 구연영은 전도사가 되어 이천읍 교회를 비롯한 19개 교회,1천3백2명의 교인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가 맡은 이 지역이 바로 그가 6년전 을미의병때 의병장으로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녔던 지역으러서 그는 이제 칼 대신 성경을 들고,피의 복수대신 십자가의 구원을 외치면 순회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구연영이 완전히 민족운동과는 결별한 교회 전도사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는 승화된 형태의 민족운동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 민중 자신이 민족문제를 심각하게 이해할 때 민족운동은 보다 강력한 힘을 얻어 추진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는 자기가 맡은 구역의 교회들을 순회하며 기독교 복음과 함께 민족의 현실을 계몽하는 강연을 하였다.

 

특히 1904년 일제의 괴뢰단체로 설립된 일진회의 정체 폭로가 그의 단골 강연주제였다. 일진회의 내막에 숨겨진 일제의 조선침략정책을 폭로하며 우선 눈에 띄는 경제침략에 대항키 위해 일어나고 있는 국채보상운동도 교회조직을 통해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아들 정서와 함께 교회청년들을 중심으로 구국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러한 민중운동에 함께 참여했던 인물로는 장춘명,고시영,안경진,박종석,김제안,원용한,한창섭,함동의,안석희,정기영,박성현 등이었다.

구연영은 잦은 일진회 규탄 강연으로 일본측으로부터 주목을 받던 중에 서사로 밑에있던 이용주의 밀고로 아들 정서와 함께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결국 이천 장터 미류나무에 묶인채 아들과 함께 총살당하였다. 그때가 1907년 8월 24일(음력 7월16일),구연영의 나이 44세,아들의 나이 25세였다. 1963.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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