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특성은 특별히 초기 개신교의 역사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은 초기 한국 개신교의 시대 구분을 1907년으로 정하는데, 이 초기의 역사는 다시 전후기의 시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전기는 선교사들의 비공식적인 선교활동의 시기이며, 후기는 공식적인 활동 시기일 것이다. 이러한 구분의 기점은 조선 정부로부터 W.L. Swallond(한국명 蘇安論)이 선교사로서 입국사증을 발급받은 1898년 6월 10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선교사들이 공개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그들도 공개적인 선교행위가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선교사들이 공개적으로 선교활동을 하지 못했던 시기에 기틀을 잡아가는 개신교의 형성은 독특한 한국교회의 성격을 드러낸다.
최근 많은 교회사가들의 연구 결과, 이 시기에 형성된 개신교의 특성을 성서 중심의 교회, 평신도 중심의 교회, 자생적인 교회들로 규정짓는다. 우선 성서 중심의 교회의 특성은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성경강조정책"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소개되기 이전에 이미 한국 개신교는 성서 중심의 교회로 자리를 잡았다. 즉 만주와 일본에서 한글로 번역된 성서를 통해 많은 개종자들이 생겨났고, 이들에 의해 초창기 교회들이 형성되었다. 예를 들면, 의주, 강계, 소래, 그리고 부산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는 선교사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한글로 번역된 성서를 읽고 스스로 개종한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특히 "한국 개신교의 요람"으로 불리우는 소래교회는 이러한 특성의 대표적인 교회의 예로 들 수 있다. 1886년 7월 18일 국내에서 이루어진 첫번째 개신교 세례의 주인공인 "노춘경"도 선교사의 권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시작된 성서의 접촉에 의해 개종했으며, 새문안교회의 형성 과정 또한 성서를 통한 초기 개종자들의 노력에 의한 성서연구로부터 이루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이곳 뿐만 아니라 성서가 배포된 지역이면 어디에든지 일어났다. 한국 개신교회의 성서중심 전통이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볼때, 네비우스의 성경강조정책은 이 전통을 이어받는 정책의 선에서 해석할 수 있다.
성서를 통한 자생적인 교회는 결국 평신도 교회로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교회는 삼자원칙 아래에서 형성될 수 밖에 없었다.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기 이전에, 또는 선교사들이 현장에 적응하기도 전에, 평신도들에 의한 자생적인 교회는 사방에서 형성되어 갔으며, 그 성장의 속도는 놀라운 것이였다. 예를 들어 한 보고서에 따르면, 1896년 평양 북서 지역에 있는 54개 마을 중 22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1년 뒤에는 53개의 교회로 증가되었고, 그중 25개 교회가 교회당을 소유했다고 한다. 1898년에는 126개의 교회로 증가하였고 이 중에서 69개 교회가 교회당을 소유했으며, 이해 한해 동안 44개의 교회당이 건축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놀라운 성장에 선교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각처로 다니며 교회를 설립해 주는 일이 고작이였다 표현할 수 있다. 결국 자치 자전 자급의 원칙 아래에 교회를 형성시켜 나아갔던 한국인들의 열정이 그러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복음의 씨를 뿌리러 왔다가 추수를 하고 있다는 언더우드의 선교 보고서는 이러한 현상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 시기에 선교사들이 상황에 이끌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가지 예를 들자면, 1895년 12월 25일 봉헌된 새문안교회를 건축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거의 선교부 지원없이 교회당 건축을 계획하는 단계에서 자신없어 하는 언더우드에게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느냐고 비난을 한 이춘호 집사의 일화는 한국인의 신앙의 열정은 물론 자급하는 한국 개신교의 특성을 들어내고 있다. 이 교회가 건축될 당시 이미 북장로교 선교회의 정책은 네비우스 방법에 의한 철저한 삼자원칙의 적용이였다. 그렇다면 이 일화는 단순히 언더우드가 자급의 원칙 하에 형성되어 가는 한국교회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한 보고라고 보기는 어렵다. 새문안 교회의 예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 온 사방에 봉헌 준비가 완료된 교회당 건물이 있다는 언더우드의 보고는 철저한 네비우스 방법이 적용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 스스로 그러한 일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자생적인 교회의 특성은 초기 한국교회를 삼자원칙에 입각한 교회가 되게 했다. 성서중심의 교회, 평신도 중심의 교회, 자급 자전 자치의 교회의 특성은 전혀 이질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된 특성이다. 실제로 성서 중심의 자생적인 교회는 초기 신앙 공동체의 자급 자전 자치의 방법에 의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징을 지닌 초기 개신교의 형성에 단지 네비우스의 삼자원칙이 선교사들에 의해 강조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제대로 시행되기 이전에 한국 개신교는 삼자원칙에 입각하여 스스로 교회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한국 개신교는 네비우스 방법에 의해 형성 발전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고 만다.
맺는말
이제 처음에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서,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한국 개신교 선교에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보자. 선교사들의 선교보고나 초기 교회사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고 대답해야만 한다. 반면에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정신이 초기 개신교의 선교정책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고, 단지 그의 지엽적인 방법만이 이용되었다고 한다면,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한국장로교회의 전통적인 선교정책이였다는 주장에 무리가 있으며, 이경우 아니라고 대답해야 한다. 경험이 풍부한 고참 선교사였던 네비우스가 선교 처녀지에 부임했던 경험없던 선교사들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선교방법의 원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던 선교정책에 의한 교회의 발전을 네비우스의 영향이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네비우스 정책이 현장에 적용되기 이전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형성되고 있던 한국교회의 역사는 네비우스 선교방법에 대한 재고를 촉구할 뿐만 아니라, 초기 한국교회의 훌륭한 특성들을 잃어가는 오늘의 교회에 새로운 선교적 과제를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이 작성될 당시의 선교의 이해가 교회의 확장이나 설립, 또는 교회성장의 범위를 뛰어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복음의 선포를 보다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에 근본원칙를 두고 하나의 선교방법을 제시한 네비우스의 선교방법은 방법론의 차원이 아니라 원리론적 차원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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