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에 남겨준 사례 연구*
들어가는 말
2010년 5월 11일부터 동경에서 열린 “From Edinburgh 1910 to Tokyo 2010" 모임에서 안타깝고도 눈물겨운 시간이 있었다. 유럽 교회의 상황 보고에 모두 눈물을 흘리며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목숨을 버리기 까지 한 그들의 노고에 대한 감사와 함께 약해져버린 유럽교회를 위해 기도한 시간이었다.
한국교회는 현재 일천만명의 성도와 2010년 현재 20,840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복음의 나라다. 이같이 한국교회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초부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노력의 결과물이다. 19세기 초에 수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만 온 것이 아니다. 아시아의 경우는 중국과 일본, 인도 등이 선교의 가장 중심에 있었고, 그리고 주변으로 아프리카와 한국이 있었다. 이는 1910년 에딘버러 선교사대회의 보고서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선교사들의 보고서는 중국, 인도, 일본 이 세 나라가 주요 연구의 대상이며, 아프리카와 한국은 조미료 역할정도였다.
하지만 유독 한국교회만이 서구 선교사들의 노력 중 가장 큰 결과를 얻었다. 이를 단순히 한국인의 인성과 당시 한국의 환경의 덕으로 치부하기에는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역할과 그들의 자세가 다른 나라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과는 사뭇 다른 면이 많다. 이러한 다른 면들은 가난한 나라며 일본의 압제 하에 있던 한국을 복음의 국가로 만들게 한 요인들이다. 이에 이러한 것들 중에서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중심으로 하되 선교초기부터 해방 직전까지의 장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선교사들 간의 협력선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아주 강한 장점은 선교사들 간에 협력 선교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중국의 경우도 일본의 경우도 선교사들의 간의 협의체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것은 그들의 것과 비교해 볼 때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 간에 협력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 온 선교사들 모두가 교파주의와 선교사 자신들의 공로주의에 물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 전도지역에 대한 역할 분담.
만주에서 압록강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한 존 매킨타이어(John McIntire)나 존 로스(John Ross)가 비록 조선인들을 전도하고, 조선인들을 위한 복음서를 인쇄하였지만, 그들만이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1891년 사무엘 모펫(Samuel Austin Moffet, 1864-1939)과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이 봉천(奉天, Mukden)에서 의주 선교에 관여한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를 만났고, 그들은 의주지역을 북장로교 선교부가 선교할 수 있도록 그 좋은 환경을 다 넘겨 주었다.[1]
또한 그들은 북장로교회 선교부가 만주 전역에서도 조선인들을 위해 보다 활발하게 선교하는 것을 보았다. 그 때에 조선인을 위해 온 북장로교선교부가 남만주에 조선인 선교를 위한 선교부를 설치하고자 1913년 스코틀란드 연합장로교선교부에 요청하였을 때, 스코틀란드 연합 장로교회는 긍정적으로 받아드려 미국북장로교선교부와 수차례 회의하였다. 그 결과, 스코틀란드 연합선교부는 남만주 일대 조선인 선교하는 것을 미국북장로교선교부에 이양하였다. 이에 북장로교는 흥경(興京, Hing-king, 일명 Shin-pin-pu)에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흥경에 선교부 활동을 시작한 것은 선교사 사택이 건립되고, 만주에서 선교할 선교사 선임이 끝난 1924년부터 시작되었다. 첫 부임은 W. T. Cook부부와 L. P. Henderson 부부였다.
2) 선교사 협의체를 구성함.
오늘날 감리교와 장로교단 사이에 누가 먼저 한국 땅을 밟았는가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우선권을 논하고 있다. 아마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듣는다면 웃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2] 그들에게 문제가 된 것을 한국 땅에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하는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비록 교단을 통해 한국에 입국하였지만 교단 중심의 선교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3] 특히 언더우드가 더 강했다고 판단된다. 이유는 언더우드가 여러 교단 선교사들과 함께 일하고자 솔선수범한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선교사 협의체는 선교사들의 수가 많아지고 선교사들 간에 발생하는 문제를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 만든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선교시작부터 이 부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는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1858-1890, J. Henry Davis)가 여동생과 함께 한국에 왔을 때에, 무엇보다도 먼저 선교사 협의회를 구성하고 함께 일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데이비스와 의논하여 데이비스는 부산 경남 지방을 책임맡도록 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1890년 선교지 답사 여행 중에 천연두로 인해 소천하였다. 이로 인해 첫 번째 협의회 구성은 끝났다.
그 후에 언더우드는 장로교 정치를 사용하는 장로교단 끼리 먼저 협의체를 만들어 함께 선교하고자 하였다. 결과 1893년에 만든 것이 “장로교 정치를 사용하는 선교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였다. 그 후 1905년 6월에 배위량(裵偉良, William M. Baird, 1862-1931)이 장로교파만이 아니라 다른 교파 특히 감리교와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 결과 9월에 장감 선교부가 모두 허락하여 “한국복음주의 선교협의회”(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기구가 잘 작동되게 하기 위해 언더우드는 감리교의 일까지도 성실하게 하였다. 그 결과 언더우드를 감리교 소속 선교사로 오인하는 자도 있었다.[4] 이러한 노력은 장감이 연합하여 하나의 기독교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이 조선에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을 방해할 자로 그들을 파송한 본국 교회로 보았다.[5]
3) 장로교단의 하나의 신학교 형성
감리교와 장로교는 각각의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각 교단은 복음전도를 위해 일군을 양성해야 하는 것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신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초기 한국교회에는 적어도 감리교는 두 개의 신학교가 설립되어야 하고, 장로교는 4-6개의 신학교가 설립되어야 했다. 하지만 감리교와 장로교는 각각 하나의 신학교만 설립하였다. 이로써 각 교파간의 분열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교단끼리의 분열을 막을 수 있게 되었고, 서로 협력할 수 있는 길과 한 교파에서는 한가지 신학만을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교단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서로 간의 갈등이 신학의 문제까지 발전하지 않았다. 한 예로, 기숙사를 자기 교단 또는 교파에 소속된 학생들만 사용하게 하기도 하였다. 즉 호주 선교부에서 지은 기숙사에는 호주 선교부 소속 학생이 사용하였고, 북장로교에서 지은 기숙사에는 북장로교 소속 학생들만 사용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나중에는 교파와 교단의 색채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하여 폐지하고 모든 학생이 필요에 따라 사용하게 하였다.[6]
감리교의 경우도 동일하다. 비록 파송 교단이 미국 북 감리교와 남 감리교로 구분되어 있지만 신학교는 Union Methodist Theological Semianry였다.[7] 이것은 당시 미국 상황에서 볼 때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한국교회를 가능한 하나되게 하기 위해 노력한 것을 볼 수 있다.
4) 선교지역 분할 정책
이 부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 꽤 있다. 그같이 부정적인 입장에서 해석하는 자들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지역주의에 휩싸여 수십년을 지내오기 때문에 그 이유를 선교사들의 지역분할 정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교 현장에서 볼 때는 그렇다고 말하기 힘든 것들이 많다. 첫째 질문은 과연 선교지 분할정책을 사용하기 전과 후에 지역주의가 확연하게 다르게 나타났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보고는 아직 없는 것으로 안다. 두 번째는 이 시각은 당대의 상황에서 당대의 문제점으로 본 시각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서 과거를 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시대 상황을 지나치게 무시한 처사라는 점이다.
지역 분할 정책은 이미 당대 선교의 한 방법이며 흐름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미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경우에는 지역을 할당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중국의 경우에는 8개 선교부로 나누어 사역하게 하였다.[8]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1912년 산동에 선교사를 파송하고자 할 때에도 미국장로교 선교부와 중국 산동성 독회(督會=老會)로부터 허락을 받아 행하였고, 그것도 지역을 산동성 래양현이라고 지역까지 제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현대적인 정치적 상황에 대입하여 지역주의의 원류로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판단된다.
물론 선교지 분할 정책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분할을 위해 장감 대표들이 첨예하게 논의한 부분과 이로인해 한국교회 교인들이 당황한 사실도 있다. 즉 분할정책으로 인해 선교지를 담당한 교파에 예양하게 되자 감리교에 익숙했던 교인들은 장로교에 익숙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고, 장로교인들도 마찬 가지여서 해당 교인들이 당황하였다. 이같이 된 것은 분할정책이 초기부터 이루지지 않았기에 일어난 문제였다. 즉 1885년부터 1905년까지 각 지방마다 이미 교세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05년의 협의체의 결정에 따라 1907년에는 남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간에 협정이 이루어졌고, 1909년에는 북감리교회와 협정이 이루어졌다. 물론 협정으로 인해 서로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북감리교회와 장로교회 간에 불협화음이 심했다.[9] 하지만 대체적으로 선교분할정책은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하와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905년 당시 이미 하와이로 이민간 한인들은 내래 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호놀룰루에 한인교회를 세웠다. 이에 이웃 섬에 있는 한인교인들이 1905년에 “한국복음주의선교협의회”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대해 장로교단 소속인 곽알련이 이 곳을 방문하여 실사한 후, 교파를 따지지 않고 현지 감리교의 도움을 받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기로 하였다.[10] 이 처럼 선교지에 대한 서로 간의 협력은 전세계적이었다. 참고로 1905년 당시 하와이에는 약 6,000여명의 한국인들이 세 개의 섬에 흩어져 있었으며 그 중에 1/3인 2000여명이 기독교인이었다.[11]
이제는 역으로 생각해 보자. 당시 선교지 분할정책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과연 선교지의 중복투자는 물론이고, 피선교지 사람들이 기독교를 좋게 보았을까? 서로 좋은 목을 차지하려고 오늘날처럼 난립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오늘 날도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기독교 각 교파구분을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로마 가톨릭과 기독교도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당시 선교지를 분할하지 않았다면 기독교에 대한 인상이 결코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은 땅덩어리임에도 경쟁선교와 중복선교로 인해 방방곡곡 복음이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12]
실제로 선교지 분할은 방방곡곡에 복음이 전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1910년에 있었던 “백만구령운동”이다. 1907년에 있었던 “대부흥운동”을 지속시키기 위해 이번에는 선교사 협의회가 이 일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한국에 존재한 모든 선교단체와 한국교인들은 책임맡은 구역에서 복음을 구석구석 전하였다. 물론 결과는 바라던 것에 비해 현저하게 저조하였지만 복음을 방방곡곡에 다 전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큰 성과였다. 이러한 백만 구령운동에 대한 George T. B. Davis의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그의 글에서, 1910년 데이비스는 군산, 전주, 광주, 목포, 행주, 평양 등지를 다니면서 구령운동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방방곡곡에서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주었다.[13]
5) 선교보고서 공동작성
선교 보고서를 선교사 개인 보고와 달리 공동으로 작성하였다는 것이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충분히 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선교사 보고가 공동으로 작성되어 선교 후원자나 선교 단체에게 보내어진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것이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초기에 각각 선교보고를 하였다. 또 교단별로 보고서와 유사한 선교에 관한 잡지를 발행하였다. 감리교는 1904년부터 The Korea Methodist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고, 장로교는 1901년부터 The Korea Field라는 잡지를 발행해오고 있었다. The Korea Field는 한국에 온 4대 장로교선교사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발행하였고, The Korea Methodist는 미남감리회와 북감리회 출신 선교사들의 활동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이 두 선교기관지는 1905년에 만들어진 선교사 협의회에 의해 합쳐지게 되었고, 1905년 11월에 통합지로서 The Korea Mission Field 제 1호가 발행되었고, 1938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발행이 불가능할 때까지 발행을 한 당시 최대 최고의 권위있는 선교지였다.[14]
이러한 선교지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공신력있는 선교지가 각 선교단체에 대해 공신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는 선교의 공신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과 서로가 협력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공신력을 여러 선교단체가 얻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he Korea Mission Field 편집자들은 자신이 소속한 선교단체를 편중되어 편집하지 아니하고, 가능한 한 균형있게 하였으므로, 신뢰를 받으며, 일본 제국이 발행을 하지 못하게 할 때까지 그 일을 훌륭하게 감당하였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선교역사의 자료로서 매우 귀중한 보고서 역할을 할 것은 두말할 것 없고, 각 선교에 대한 객관성 확보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매우 공정하게 폭넓게 다른 선교단체와 교단 선교방법이나 동향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에 한 쪽으로 치우친 선교를 막는 귀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고서는 선교사를 파송한 단체나 교회가 선교지 현장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와 동참을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선교 현장을 본다면 선교지에 대한 공신력있는 선교단체들이 많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볼 때에 한번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2. 선교지에 대한 연구 보고
한국교회가 선교한지 100년이 지났다고 자랑한다. 그리고 초기부터 하와이, 중국의 산동, 일본, 블리라디보스독 등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해방 이후로는 태국, 대만, 인도네시아, 리비아, 라이베리아, 미국 등으로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현재는 무려 169개국에 가까이 선교사를 파송하였다고 한다. 이에 비례하여, 선교에 관학 신학팩은 비교적 많이 발행되었지만, 선교지에 대한 정보는 역시 몇 권 안된다. 이것도 최근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자서전은 1970년대에 두 권정도가 있었으나, 선교지 자체를 소개하는 책은 아마 필자가 1989년에 기술한 『케냐와 선교』가 처음이라고 판단된다. 이처럼 한국교회에 선교지에 대한 정보제공이 거의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교회선교 초기부터 한국교회에 있어 온 현상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長老敎會史 典彙集』이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곽알련(Charles Allen Clark, 1878-1961, 郭安連)이 1918년과 1935년에 기술한 것으로, 자료가 너무 미비하여 부정확한 것이 많다. 이유는 한국교회사에 관한 것에는 서구 선교사들이 직접관여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교사들과 관계된 것들은 비교적 자료화가 잘되어 있어서 지금도 한국교회사나 선교역사에 대한 연구를 그들이 정리해 둔 것을 통해 얻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해외로 나간 선교에 관한 자료는 서구선교사들인 남긴 것이 아니라면 정말로 찾기 어렵다.
한국교회가 선교활동과 선교지에 대한 연구 및 자료를 정리하여 남겨야 하는 이유는 바로 파송국가가 선교를 더 잘 하기 위한 면과 피선교국가가 나중에 정체성을 갖는 교회로 성장하기 위해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교회와 사회에 대해 가장 많은 글을 남긴 자 중에 한 명은 감리교 선교사 존스(George Herber Jones, 1867-1919, 趙元時)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재건 교수에 의하면, 그가 남긴 자료 중에 1910년대에 이미 한국교회사를 미국 신학교에서 한 학기를 강의하였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한국에 개신교 복음이 전해진지 불과 30년 밖에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사를 강의할 수 있다면 그가 한국교회에 대해 얼마나 많은 연구하였을까? 존스의 강의안은 약 200여쪽에 달하였고 현재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15]
또 한 명으로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를 들 수 있다. 1886년 한국에 육영사업의 일환으로 온 이후 한국의 역사, 풍습, 언어 등을 전 세계에 영문판으로 알린 자였다.[16] 물론 그는 정치적인 활동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지만 보편적으로 당시 선교사들은 피선교지에 대해 연구하여 본국에 알림으로 선교의 동력으로 삼았고, 그것이 오늘 날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좋은 자료가 되어 있다.
경인문화사가 출판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한국에 대한 자료를 기록한 분량이 무려 200권에 이른다.[17] 조그마한 나라 한국에 대해서 쓸 수 있는 글이 얼마나 많게 보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 의미는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조그마한 나라라고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한국의 민속과 역사, 문화와 지리 등을 귀하게 여겼고, 이를 자국에 소개하여 한국을 선교하고자 얼마나 노력하였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어를 안다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고자 노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한국교회는 해외 선교의 역사와 선교사의 수를 자랑하지만 실제로 활동하는 선교지에 대한 연구는 극히 빈약하거나 아니면 개론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3. 성경의 언어 결정
한국에 복음이 전해지는 방식이 다른 나라와 특이하게 달랐던 점은 한국에 선교사들이 오기 전에 이미 쪽복음 성경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수정이 일본에서 회심한 후에 현토식으로 온 선교사들은 한국에 이미 성경 일부가 이미 번역된 사실에 놀랐다. 그러면서도 새롭게 성경을 번역하면서 한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당시 언문이라고 한 한글을 택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에 복음 전파에 어떤 것이 더 쉬울 것인가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언듯 생각하면 당연히 한글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한글을 택할 때에 따르는 지도층 계급들의 반대를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함께 고려한 결과 서민 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여 한글을 택하였다. 이것은 이수정이 일본에서 현토식으로 성경을 번역한 것과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신학의 수준 결정
이 부분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특히 Reynold 선교사에게 부정적인 비판을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또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수준이 낮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과연 한국에 온 선교사 중에 누가 수준이 낮은 자인가 하는 점이다. 당시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 대학을 졸업한 자가 전 인구의 몇 %에 해당되었는가? 미국에서조차도 대학을 졸업한 자는 삶이 보장되는 자들이었다. 나아가 의과대학을 졸업한 자는 존경을 받으며 살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나라, 학문이라고는 서당과 성균관이라는 것 밖에 없는 나라에서 수고하였다. 이는 곧 학문적인 수준 자체를 소화해 내기 어려운 나라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나라에 박사들이 꼭 와야 했다는 주장은 지나친 현대적인 입장에서 본 주장이다. 당시 상황만 보아도 굉장한 수준에 있는 자들이 선교사로 왔다.
문제는 당시 한국인들이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수준이 낮았다는 점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서양선교사들은 한국인을 가르칠 때에 과목을 보면 산수, 가감승제, 분수, 비례, 대수 및 기하 등을 고등학교에서 가르쳤다. 물론 이 외에도 동물학, 식물학, 한국역사도 포함되어 있다.[18] 그러므로 당시 한국인이 미국선교사들이 원하는 수준을 따라 가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복음주의자들이었던 초기 선교사들이 택한 신학의 방향에 대해서는 복음주의자들로서 정당한 것이었다. 현시점에서 자유신학을 복음전파시기 초기부터 가르친 일본과 중국과 비교해 보면, 월등히 성경적인 신앙형태를 가진 것이 한국이며, 나아가 기독교가 성공적으로 안착한 곳도 한국이다. 즉 예수를 믿지 않아도 예수 믿는 자들은 이러한 자라는 전형적인 기독교 문화를 제시하였고 이를 정착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입장에서 보지 아니하고 단지 학문성 그 자체만 따지는 것은 선교사역의 본질과 복음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지나친 학문적인 입장에서만 주장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5. 선교사상의 고취와 훈련
곽안련에 의하면, 한국교회는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지 불과 28년만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며 대단히 기뻐하였다.[19] 한국교회는 이것이 마치 한국교회에서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 한국교회가 해외로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던 중요 요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린 아이와 같은 한국교회에 비젼을 심어 준 것이다. 1900년 신천에서 있었던 남자 대 사경회에서 선교사 이길함(Graham Lee, 1861-1916, 李吉咸)은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위하여 선교를 하여야 하는데 남자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설교하였다.[20] 또한 1907년에 장로교의 경우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문제에 모펫(Samuel Moffett, 1864-1939) 선교사가 적극적으로 이 일을 한국교회가 할 것을 독려하였다. 산동성 선교도 마찬가지였다. 1912년에 장로교 제 1회 총회에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였지만 실상은 중국에 선교사를 한국 교회가 파송하여야 한다고 선교사들이 수년간 한국 교회에 간청(appeal)하였다.[21] 또한 선교사 실제로 산동성 선교를 성사시키기 위해 한위렴(W. B. Hunt) 선교사는 중국을 다니면 미국 선교부의 협조와 중국 산동성 독회(督會)와 협의하였다.
두 번째로, 선교에 대한 교육을 하였다는 점이다.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에게 교육을 중점적으로 한 것은 동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양세계와 아프리카 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계사와 지리 과목을 가르쳤다. 이것은 시야를 넓게 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중고등학교와 신학교에서만 가르친 것이 아니다. 지지역사(地誌歷史) 시간에 만국지리(萬國地理), 만국상고사(萬國上古史), 외국역사(外國歷史) 등을 가르쳤으며,[22] 평양신학교에서는 미국역사도 가르쳤다.[23] 이로써 외국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였다.
나아가 선교학이 없던 시기에 평양신학교에서 선교역사(History of Modern Missions)를 가르쳤다. 이는 다른 선교지 특히 중국과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획기적인 판단이었다.[24] 선교역사를 신학교에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일반대학교 곧 우리가 말하는 숭실대학교에서도 가르쳤다.[25]
뿐만 아니라 한국의 기독교 교역자들에게는 선교가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기독신보에서도 선교사상을 고취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현대선교의 대표적인 인물인 리빙스톤에 대해 1년이 넘게 연재하였다.[26] 뿐만 아니라 『기독신보』에 보면 해외선교 동향은 자주 게재되었고, 1919년 10월 29일자에는 “선교는 교회의 최선의 의무”라는 주제로 선교의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1900년 4월 8일자 『대한그리스도인 회보』에서는 영국과 미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소개하여 선교는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것임을 말하였다. 장로교신학교의 정기 간행물인 신학지남도 마찬가지다. 1918년도 제 1권에서는 William Carey 의 활동을 소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선교 상황도 복하여 선교는 교회의 당연한 것임을 고취시키고 있다. 이처럼 각종 문서를 통하여서 선교의 당연성을 고취시켰으므로 한국교회는 선교에 앞장 선 교회가 되었다.
세 번째가 복음전도의 훈련을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시켰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훈련을 시킨다고 할 때에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라는 구분이 있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그런 식으로 교육시키지 않았다. 도리어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선교사 협의회 모임에 참석하여 그들이 행하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게 하였다. 나중에는 한국인끼리 모여 회의를 하는 것도 있었지만, 한국 주요 지도자들에게는 선교사들의 모임인 선교 협의회에 참석하는 정도가 아니라 언권까지 주는 획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로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선교를 피 선교지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행정적인 것도 배우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01년에 만들어진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로서 이 회에 조선인 총대가 참석하여 선교사들의 모든 행사를 볼 수 있었고, 1904년부터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무려 65명이나 참석하였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회의를 통하여 선교가 무엇이며, 선교에 대한 것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27]
네 번째는, 선교지에서 어떤 선교 방법을 택할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하였다. 곧 언더우드와 함께 한 장로교 출신의 선교사들은 선교 방법을 알고자 고심한 끝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추천한 존 네비우스(John Nevius, 1829-1893)의 선교방법을 2주간 수업받았다. 그리고 토의 끝에 한국형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결정하였고 이를 모든 장로교선교사들에게 정착시켰다.[28] 그리고 이러한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평양신학교에서 1902년부터 교육하였다는 점이다.[29] 이는 선교에 대해 빨리 눈을 뜨게 할 뿐만 아니라 선교가 하나의 비젼정도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실력까지 갖추게 하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여야 할 부분이다.
6. 선교사 지위에 대한 존경
한국에 1907년 대 부흥운동을 일으킨 자는 따지고 보면, 감리교 선교사 하디(Hardie)라 할 수 있다. 그는 본래 중국 산동지방 선교사로 사역하였지만 의화단 사건(Boxer Movement)으로 인해 한국으로 피난 온 의사였다. 그가 회개하는 심정으로 기도운동을 편 것을 하나님이 받으셔서, 한국교회에 대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발단이 되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 보면, 신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닌 하디를 당시 한국선교사회가 존중하여, 목사 선교사들이 그에게서 강론을 들었고, 그를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부흥회의 강사로 초청하여 들었다는 점이다. 비록 선교사들끼리 다툼과 비난이 있곤 했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은 아름다웠고 결과 대부흥운동의 불이 타기 시작하였다.
7. 학교교육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행한 일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은 학교 교육이었다. 일반적으로 병원과 학교 교육은 수많은 돈이 들어가는 사업이기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지만 실상은 매우 쉽게 접근하였다. 이유는 그만큼 문맹자가 많았기 때문이며,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을 통하여 선교사들은 교회가 설립되는 곳마다 소규모의 학교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학교교육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급성장을 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만들었다.
첫 번째로 교육의 수단으로 한글을 채택한 것은 한국의 교육을 급성장하게 한 것이다. 언문으로 천대받던 것이지만 선교사들의 판단은 옳았다. 한자형 성경 또는 현토식 성경이 아니라 한글식 성경을 택함으로 한글의 보급과 오늘 날의 한글이 있게 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두 번째는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소규모 학교를 세운 것이다. 소규모 학교는 교사와 학생 간에 서로를 알고 서로가 가족처럼 지낼 수 있는 가장 좋은 학습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오늘 날 기독교 학교들은 매머드하게 되어 누가 교사이며, 누가 학교 손님이며, 학생인지 구분할 수 없다. 다만 수업 시간에 직접적으로 만나는 자들끼리만 알게 되어 인격적인 교육이라고는 거의 일어나지 못하는 환경이 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는 소규모 학교였으므로 가족과 같은 공동체 분위기였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에도 인격 대 인격의 만남으로 이루어졌기에 흔히 말하는 mission school을 다닌 많은 학생들이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오늘 날 학교교육을 하고자 하는 자들을 보면 큰 학교를 꿈꾼다. 과연 대형 학교에서 인격적인 교육이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8. 복음전도 방법의 연구
선교학이 발달하기 이전에, 선교의 열정으로 똘똘 뭉친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지만 그들 나름대로 갈등이 컸다. 어떻게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선교방법으로는 Henry Venn(1796-1873)과 Rufus Anderson(1796-1880)이 중심이 된 Three-self 이론이 있었고, 이를 기초하여John Nevius가 만든 Nevius Methods, 그리고 Roland Allen(1868-1947)의 Spontaneous Expansion Theory(자발적 확장이론[30])가 있었다. 그 중에서 네비우스의 방법을 배워, 이것을 응용하여 한국식 네비우스방법을 찾아 내었고, 이를 한국선교에 적용하였다.
오늘 날에는 Donald McGavran이 Bridge of God이라는 책에서 “people movement”(종족운동)선교의 방법을 제시하였고, 또한 Ralph Winter는 Insider Movement(내부자운동)를 제안하였다. 이 외에도 교회성장학을 중심으로한 Peter Wagner의 성장이론, 생물학의 이론 곧 Libig의 최소량 법칙을 응용하여 만든 교회성장이론 등 여러 방법들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방법들 또는 다른 방법들을 각 선교지마다 존재하는 독특성에 맞게 수정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선교 방법을 찾는 것은 매우 바람직 하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노력을 이미 우리 한국의 복음전도를 위해 수고한 선교가들로부터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구가 각 선교지에서 다시 한 번 시도해도 좋을 것 같다.
마치면서
한국교회는 한국에 선교하러 온 선교사들로부터 좋은 유산을 많이 받았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선교사들의 장점을 약점으로 보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 시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훌륭하게 선교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비판은 지금 선교하는 자들이 조심해야 하는 것들을 찾으려는 입장에서 비판을 해야 긍정적인 비판이 될 것이다.
긍정적인 입장에서 그들이 행한 것을 보면, 전체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하였다.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해결해 주고자 하는 면도 강했지만 결코 복음과 생활의 현장에서 선후관계를 잘 구분하여 진행하였다. 또한 공통된 사명인 복음 전도를 위해 교단이 다르고 교파가 달라도 서로 협력할 수 있는 협의체를 만들어, 관계를 초기부터 잘 형성하되 복음을 목적으로 잘 진행하였다. 그 중에는 선교지 분할정책을 통하여, 분명히 불리한 조건이라고 하여도, 선교지 분할정책을 비교적 잘 이행하여 한국의 방방곡곡에 복음이 다 전해지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 또한 선교협의회는 한국교회에 선교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나아가 선교사상을 어린 교회지만 심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파송기관과 피선교지 간에 일어나는 것들과 정보들을 제공하여 선교를 더 왕성하게 하였다. 나아가 때로는 선교사들 간에 갈등도 있었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학교 교육을 성실하게 실천하여 문화향상과 함께 복음이 더 잘 전해지도록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오늘 날 꼭 필요로 하는 부분이다. 또한 이런 것들이 오늘 날에도 선교지에서 잘 이루어진다면 선교는 힘있게 계속 진행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