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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구분  지식사전  작성일  2007-06-07
 제목  네델란드의 장로교회
 주제어  [장로교] [네덜란드]
 자료출처    성경본문  
 내용

1.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 배경


 칼빈주의는 네덜란드의 국가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네덜란드 국민의 생활 가운데 계속적으로 현저한 요소가 되어왔다.


네덜란드 종교에 있어 근대적 시기(the modern era)는 루터나 칼빈과 함께 시작된 것이 아니라, 14-15세기의 형제단 운동, 특히 '공동생활 형제단'(Brethren of the Common Life)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1378년 제라드 흐루트(Gerard Groot)와 플로렌트우스 라데빈스(Florentius Radewins)에 의해 창설되었고, 그 요람인 데벤터(Deventer)에서부터 여러 동네로 전파되어 북유럽의 많은 대학들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학교 교사로서의 형제단원들은 학문과 지성(literacy and intelligence)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신약성경 헬라어와 다른 성경연구에 흥미를 보였으며, 구어체로 된 성경의 보급을 주장하고 그것에 힘써왔다. [평범한 언어로 된 성경을 읽을 필요성]은 창설자들의 동료인 제라르 제르볼트(Gerard Zerbolt)가 쓴 논문의 제목이였다(1398년). 형제단은 이러한 목적 및 다른 종교적 목적을 위한 인쇄 출판에 있어서 선구자였다. 그들의 신학은 어거스틴적이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저술한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는 '데보티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의 신앙을 가장 잘 요약한 사람이다. 그는 라덴빈스(F. Radewins)의 영적 지도 아래 있게 된 12세 때부터 그의 생애의 마지막까지 그 운동에 전적으로 몰두하였다. 데보티오 모데르나(혹은 the Modern Devotion) 운동의 지도자들은 종교적 학교들을 세웠다. 여기서 학생들은 도덕과 하나님 경외를 배웠으며, 이와같은 방식으로 수도원과 교회에서 생활할 사람들로서 준비를 갖추었다.
공동생활 형제단의 학교와 수도원은 신비적 명상의 삶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사람들에게 회개와 신앙의 필요성을 가르쳤다. 그들의 학교는 학문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고 특히 고전 연구를 격려하였다. 에라스무스 등의 인문주의자들은 이러한 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러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의 악덕을 보았고, 교회의 부패에 대한 저항을 글로 표현하였다.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는 그의 [우신예찬](The Praise of Folly)에서 교회와 사회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는 헬라어 신약성경의 본문을 편집하여 출판했다(1516년). 이것은 종교개혁을 위한 중요한 공헌이었다.
네덜란드의 카톨릭 교회 안에서 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그 많은 요인들은 종교개혁을 향한 길을 마련해 놓았다.


첫째로, 당시의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실천에 대한 비평이 있었다(criticism of the doctrine and practice of the Catholic hurch).


둘째로, 단순하고 실제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simple, practical, Biblical Christianity)에 대한 강조가 증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의 부흥이 일어났다(revival of preaching of the Word of God). 이것은 로마교회가 거의 전적으로 상실하고 있었던 면이었다.


2. 네델란드의 종교 개혁과 탄압


그러면, 네덜란드에서의 종교개혁의 기원을 살펴보도록 하자. 비록 후에 칼빈주의가 그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표현이 되었지만, 루터의 글들이 먼저 소개되어 널리 읽혔다. 어거스틴파 수사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가르쳤고, 1523년에 이미 그 수사들 가운데 두 사람이 이단 혐의로 브뤼셀(Brussels)에서 화형을 당했다.
로마 교회의 끈질긴 박해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 카알 5세와 재세례파
종교개혁 당시 화란의 통치자는 카알 5세(Karl Ⅴ, 1500-1558)였다. 그는 1519년 신성로마 황제(1519-1556)가 되었다. 특히 그는 신성로마 황제가 된 다음부터 화란의 개신교도들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중엽 화란은 오늘날의 벨기에, 룩셈부르크(Luxemburg)와 함께 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다. 크게 보면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였다. 화란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16세기 중엽의 화란은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었고, 당시 스페인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다. 또한 화란은 문화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었다. 화란은 일찍부터 인문주의가 발달하여 북구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카알 5세의 개신교 탄압으로 인해 가장 많은 희생을 당한 사람들은 루터교도가 아니라 재세례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화란 재세례파의 기원은 1520년대 말 독일 출신의 호프만(Melchior Hofmann, c. 1496-1544) 이 화란과 독일의 북부 국경지방인 프리즐란트(Friesland)에서 전도활동을 한데서 찾아볼 수 있다. 호프만의 영향을 받은 재세례파를 멜키오르파라고 한다.
멜키오르파의 지도자였던 얀 마티스(Jan Mattys)와 얀 복켈손(Jan Bockelson)이 독일 서북부 뮌스터에서 '시온 왕국'이라는 재세례파의 천년왕국을 건설하려다가 실패한 1533년 이후, 화란의 수많은 재세례파 신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재세례파는 로마교회 뿐만 아니라 개신교에 의해서도 심하게 박해받았다.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이 모두 비판하였다. 그들은 수만명이 죽었고, 오늘날까지도 심한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찬송학과 순교론이 동정적 차원에서 연구되고 있다.
재세례파의 교리는 후에 보다 평화적인 멘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에 의해 대부분 수정되었다. 시몬스는 카톨릭 사제의 신분에서 루터의 사상으로, 그리고 다시 재세례파의 견해로 옮겨간 인물이었다. 메노파(Mennonites)는 16세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메노파는 성인 신자에 대한 세례를 주장하고, 개체교회의 책임과 권리를 강조하며 교인의 세속 권력 참여를 반대한다. 17-18세기에 이르러 메노파는 네덜란드 안에서 영향력이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카알 5세의 지하에서 화란의 개신교도는 전반적으로 보아 크게 성장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카알 5세 때에 화란에서는 종교로 인한 국가분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카알 5세의 뒤를 이어 필립 2세(재위 1556-1598)가 스페인 왕이 되었을 때 사정은 매우 달라졌다. 편협하고 광신적인 카톨릭 신자인 필립 2세는 4년간 네덜란드에 살았는데,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그는 로마교회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탄압정책을 수행하였다.
결국 네덜란드에서 필립의 정책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의 제단과 상(image)을 파괴하였다. 군중 봉기는 성공했으나, 무자비한 억합 정책이 뒤따랐다. 스페인의 장군 알바 공작(the duke of Alva, 즉 Ferdinand Alvarez de Toledo, 1508-1582)은 필립 2세의 충성스러운 심복이었고, 잔인한 방법으로 억압 정책을 펴, 기를 꺾었다.
1567년 8월, 알바 공작은 브뤼셀에 입성하여 여러 귀족들을 체포하고 공포정치를 시작하였다. 9월 20일부터 법정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소위 피의 의회(Council of Blood)를 조직하였다. 알바 공작은 유죄에서 처형까지 사이에 죽은 10만명의 신교도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 있다고 한다.

 

(2) 네델란드의 장로교회
이런 와중에서도 네델란드 장로교회는 성장하고 조직을 갖추며 세계 장로교회사의 기초를 닦게 되었다.
1559년 프로테스탄트 운동은 조직화되어 결집해서 하나의 교회를 만들었다. 그 해 제네바에서 칼빈의 교육을 받은 한 목사가 오늘날의 벨직 신조르 알려진 칼빈주의에 입각한 신앙고백을 만들었으며, 1563년 안트워프(Antwerp)회의에서 장로주의에 입각한 교회 헌법이 작성되었으며, 이 헌법에 기초해서 대단히 많은 장로교회가 조직되어졌다.
1569년 네델란드 장로교회는 독일의 엠덴(Emden)에서 회의를 열어 대회(Synod)를 조직하고, 각 교회로부터 대회까지 전 교회 조직이 만들어졌다.
네델란드 장로교회의 하나의 특징은 한 마을에 장로교회가 몇 개가 있든 그들은 하나의 당회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 세워진 개혁교회는 그들의 신앙 성명으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와 [벨직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였다. [벨직 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는 칼빈주의적인 것으로서 프랑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에 의거한 것이다. 그것은 1561년에 칼빈의 제자인 프란시스 유니우스(Francis Junius)가 개정하였고, 1572년에 도르트레히트(Dordrecht)회의에서 승인을 얻었다. 이것은 모든 교회들의 신조(the creed of Netherland Protestantism)가 되었다. 또한 모든 교회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Heidelberg Cattechism)을 채택하였다.
1575년 라이덴 대학이 설립되었고, 이어서 프라네커(Franeker), 그로닝겐(Groningen), 우트레히트(Utrecht) 그리고 하더위크(Harderwijk) 대학이 설립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신학교육(theological training)을 실시하는 학교가 되었고 여러 나라로부터 학생들이 몰려 왔다.
17세기까지 화란의 신학자들은 전(全) 기독교계에서 높은 지위와 명성을 차지하였다. 그들이 개신교에 준 영향은 지대하였고 칼빈주의를 더 널리 전파시키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3) 침묵의 사람 윌리암


교회가 조직되어 가는 가운데도 고통스런 박해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1584년 북부 네덜란드는 "침묵의 사람"으로 역사에 알려져 있는 오렌지 공(公) 윌리암(1533-1584)은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여 네델란드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네델란드 북부 7개 주는 독립하고 1579년 네델란드 공화국이 한 연방을 형성하였다. 이 나라는 실제로는 장로주의 공화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긴 기간 동안의 쓰라린 투쟁을 거쳐 그들은 로마교회와 스페인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장로주의의 대표적인 정치형태라고 하는 가르침이 일반 세속정치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4) "바다 거지들"(Sea Beggars)의 역할


네델란드 주민들은 겔만 대양에서 언제나 파도와 싸우며, 척박한 국토와 투쟁하는 선원들과 어부들과 상인들이었다. 이들을 "바다거지들"라 하였는데, 이들은 신교 개혁사상을 받아 들여  스페인의 종교 재판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사랑하고 그들을 배척하는데 큰 역할을 해주었다.
윌리암은 이 바다거지들을 스페인을 격파하기 위한 해군력으로 길러 조직 이용하게 됨으로서 스페인 군에게 큰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스페인의 알바공의 폭정에 네델란드는 폭동에 들어가게 되었고, 윌리암의 바다거지들은 스페인의 함대들을 무찔러 나가기 시작하였다. 홀연히 부른(Voorn)성과, 네델란드의 요새인 브릴(Brill)성을 빼앗으므로서 스페인으로 하여금 네델란드 주인노릇을 못하게 만들었다. 전쟁은 오랜 동안 계속됐고 바다거지들은 해안 도시들을 공략해 나갔다. 1572년 4월 1일 홀란드와 질란드의 중요 도시들을 장악하게 되었다.
드디어 윌리암은 네델란드의 총독으로 선언되게 된 것이다. 윌리암은 국민의회를 돌트에서 소집하였고, 여기서 주어진 권한으로 로마교회나 신교의 예배는 동일한 자유를 갖는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 후 바다 거지들은 알바의 재 공포의 복수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3. 알미니우스와의 논쟁


한편, 네덜란드 교회는 예정론의 본질에 관하여 격심한 신학 논쟁을 하게 되었다.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인 아르미니우스(Arminius, 1560-1609)는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뜻)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리적 결론(칼빈의 입장)을 반대하였다. 그의 교리는 도르트 회의(1618-1619)에서 정죄되었다. 그러나 그 주장은 게속 전파되었으며 18세기 웨슬레에 의해 채택되어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고 1576년부터 1582년까지 라이덴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그 후 제네바로 가 베자(1519-1605)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제네바에서 돌아온 아르미니우스는 1588년 부터 자기 고향 암스테르담에서 목사로 봉직하였다. 그는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또 성경과 신학에 관하여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그는 또한 목회상담자로서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당시에 화란에는 코오른헤르트(Dieryk Coornhert, 1522-1590)라는 법률가가 있었는데, 그는 칼빈주의 신학을 합리주의적인 인문주의 신학으로 극복하고자 시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르미니우스에게 그의 글을 반박하는 글을 써 주도록 부탁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그의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 그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르미니우스는 코오른헤르트의 사상에도 부분적으로는 옳은 점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코오른헤르트는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의 영향을 받아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의 타락에 대한 기사야말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적 증거라고 보고, 하나님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항상 협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그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자유의지론으로부터 '힌트'를 받아 칼빈의 예정론에도 비판할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자기의 이러한 사상 변화를 상당 기간동안 숨겼다. 그러다가 1603년 라이덴 대학 교수가 되었을 때부터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 놓게 되었다. 결국 이것이 같은 대학의 신학교수였던 고마루스(Gomarus, 1536-1641)와의 격렬한 신학적 논쟁의 계기가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타락전 예정설(supralapsarianism)에 반대하였다. 그는 유기의 작성 혹은 이중예정을 부정하였다. 고마루스는 타락 전 예정설을 고수하고 유기의 작성을 믿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예정된(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 두 사람 사이의 논쟁은 1609년 아르미니우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교수가 된 사람은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 1583-1643)였다. 그는 죽은 아르미니우스를 대신하여 고마루스와 예정론에 관한 논쟁을 계속하였다. 이 때 고마루스는 라이덴 대학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교수직에서 축출하려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교수직을 박탈당할 위기에 몰린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당시 궁정목사로 있던 요한 위텐보가에르트(John Wtenbogaert, 1557-1644)와 문제 해결책을 상의하였다. 위텐보가에르트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지지하는 목사 46명의 서명을 받아 화란 의회에 소위 [항의문](Remonstrance)을 제출했다(1610-년). 그들은 그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개 조항으로 요약하였다 :


① 예정 :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될 자를 미리 예정하셨다.
② 구속 :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다(그러나 그들은 만인구원론은 믿지 않았다).
③ 죄 혹은 자유의지 :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선한 자유의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혹은 성령의 역사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사람들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④ 은혜 :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원죄의 영향력을 깨뜨려 버릴 만한 충분한 은혜를 주셨다. 또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은혜로 주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중생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 충분하고도 능력있는 은혜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은혜는 '불가항력적'(irresistible)이라고 말할 수 없다.
⑤ 성도의 견인 : 성경에는 '성도의 견인'에 관한 가르침, 곧 한 번 중생한 신자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가르침에 대해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에 반대되는 가르침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고마루스 일파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1611년 [반(反) 항의서]를 의회에 제출하여 국가가 정통 칼빈주의 교리를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4. 도르트 회의


아르미니우스 논쟁은 도르트 회의(1618. 11-1619. 5)에서 결말지어졌다. 이 회의는 어떤 의미에서 개혁교회 최초의 세계대회가 되었다. 화란 교회의 대표는 약 70명이었고 그밖의 나라에서는 모두 27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위그노 대표는 프랑스 왕 루이 13세가 참석을 금지시켰으므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 회의에서는 [항의파]가 대표의 자격이 아니라 피고의 자격으로 출두하여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진술해야 했다.
도르트 회의는 칼빈주의 5대 원칙을 채택하였다 :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③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이러한 칼빈주의 5대 원칙(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은 아르미니우스 5대 원칙에 대응하고, 반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5대 원칙의 영어 첫 글자를 조합하면 튜울립(TULIP)이라는 말이 된다. 튜울립은 화란의 국화(the national flower)이다.
물론 이 다섯 가지 교리가 칼빈주의의 전부라고 말할 수 없으나, 이 교리는 후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 기본적 골격이 되었다.

 

 

>> 목차고리 : 장로 교회사

>> 연결고리 : 장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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