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개역개정   KJV   NIV   공동번역   북한성경   Afr1953   BulVeren   Dan   GerElb1871   GerElb1905   GerLut1545   GerSch   UMGreek   ACV   AKJV   ASV   BBE   DRC   Darby   ESV   Geneva1599   GodsWord   HNV   JPS   Jubilee2000   LITV   MKJV   RNKJV   RWebster   Rotherham   UKJV   WEB   Webster   YLT   Esperanto   LXX(o)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kcmseoul  작성일  2008-04-11
 자료구분  주제어  주제어  교훈받는 요나
 내용

성경:요나4:1-3               요나의 분노

   어떤 경우에 솟구치는 분노로 온몸을 떠십니까? 혹 하나님을 인하여 분노하신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적은 없습니까?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하나님을 향해 가인은 치를 떨며 분노의 포로에 사로잡혔고(창세기4:3-7), 순전히 주님을 위한 법궤 옮기는 선한 일에 돕기는커녕 오히려 애꿎은 사람을 쳐서 끔찍한 죽음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다윗은 일순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사무엘하6:6-8).

Ⅰ.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1절)
   고국을 떠나는 것이 요나에게는 크나큰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 정든 고향 편안한 집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즐거움을 포기하는 일이 요나에게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품을 뒤로하고 훌쩍 낯선 타향에서 홀로 지내자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들을 멀리 두고 이국에서 생활하자니 눈앞이 캄캄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순순히 주님의 명령을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할 수 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정반대의 방향인 다시스로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렇지만 요나의 뜻대로 일은 진행되지 않았고 순전히 주님의 뜻만이 폭풍우와 큰 물고기로 인해 이루어질 따름이었습니다. 결국 요나는 제정신이 들었고 순종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고생을 감수하며 주님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요나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이었습니다.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 그리고 어렵사리 얻게 되는 음식물과 생수는 여행 중 겪는 고통의 기본이었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낯선 이방 여행객을 바라보는 곳곳의 공격적인 매서운 눈초리들은 더욱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치안부재의 그 시대에 겪는 외로움과 삭막함을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하리요? 그러나 주 하나님의 명령, 오로지 그 하나만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 요나는 기꺼이 그 모든 어려움을 감내하였습니다. 니느웨를 향하여 담대하게 심판의 메시지를 외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할 일을 다한 사명완수에 가슴 뿌듯하며 그간의 모진 노고를 아이스크림 녹듯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서히 요나의 뱃속은 뒤틀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는 온갖 고생하며 사명 감당했는데 정작 자기에게 막중한 임무 부여하신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아니 심판을 발설하신 하나님께서 마땅히 하셔야 할 일을 다하지 않고 계시지 않은가? 가지 않겠다고 도망치며 버틴 자신을 벼랑 끝에 몰아 넣어 가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과 맞물려 괜한 고생 헛걸음한 마음에 억울함이 솟구쳐 오릅니다. 망할 니느웨는 더욱 멀쩡하고 그간의 고생으로 몰골이 말이 아닌 자신을 보노라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그간의 고생이 아무 짝에도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마치 농락 당하고 실컷 이용당한 기분에 분한 마음이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한 마음뿐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주를 위해 한 일에 대한 대가가 겨우 이거란 말인가? 말도 안돼. 하나님이 싫어집니다.

   요나의 분노는 정당하지 않다. 머슴이 어찌 주인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거침없이 화를 쏟아 내리요?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 할지라도 혹은 부당한 처사라 판단된다 할지라도 종은 종이요, 일꾼은 일꾼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기에 하등의 실수나 티끌 만한 부족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요나4:1-3            요나의 착각(錯覺)

   주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신앙이 참 귀합니다. 그러기에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호세아6:1-3). 신앙 생활에 있어서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에 대하여 불순하게 가지는 그릇된 인식입니다. 바로 알 때 바로 믿게 됩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려고 힘써야 합니다.

Ⅰ. 시험에 든 요나
  한때 요나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시지 긍휼의 하나님은 아니셨습니다. 요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 결정적인 시험에 빠져들었습니다. 당연히 바닷물에 빠져 허무하게 객사할 수밖에 없었던  불쌍한 처지에서 주님의 은혜를 입어 극적인 삶을 체험하였던 요나였지만 심령이 강퍅해졌습니다. 자신에 대하여는 긍휼의 은혜를, 이웃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을 바라는 요나의 못된 심보를 읽을 수 있습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자비의 하나님을 온몸으로 부닥쳐 눈물겹게 만난 체험이 그에게는 분명히 있었지만 쉽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받은 은혜를 쏟아 붓는 어리석음에 빠졌습니다. 요나는 주체할 수 없는 격분에 쌓여 존귀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을 빈정거리듯 멸시하였습니다. '이제 보니 주님이 말씀하신 심판이란 낱말은 순전히 입에 발리운 것에 지나지 않았군요. 속뜻은 전혀 딴데 있었군요.  그러한 주님이신 것을 진즉 알지 못한 것이 내게는 너무나도 안타깝고 억울하군요.' 울근거리는 감정을 격하게 쏟아 붓는 요나의 모습에서 혹시 우리네 모습은 안 보이는지요?

Ⅱ. 요나의 몰이해(沒理解)
  헛물켠 듯한 속상함에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 세 치도 안 되는 혀를 함부로 놀린 요나는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설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하더라도 그는 분명히 오해와 편견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심판보다 앞서는 주님의 긍휼을 그는 가볍게 보았습니다. 할례 받지 못한 아무리 고약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우리 주 하나님은 용납하기를 진정 원하십니다. 물론 참된 회개가 전제되고 수반될 때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하나님은 원칙도 없이 말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나의 눈에는 쉽게 뜻을 바꾸시는 하나님으로 비치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기회, 즉 회개할 기회를 먼저 주시는 것에서 시작함을 요나는 놓쳤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마음을 찢으며 통회 자복하는 자들에게는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요나의 진술은 진리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그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요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심판의 유황불을 즐겨 쏟아 부으시는 심판의 주님으로만 보려고 고집을 부립니다(요나4:5).

  '아는 것이 병'이라는 속담도 있듯 분명찮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네 신앙 생활에 커다란 병폐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한 요나는 시험의 올무에 단단히 걸려 넘어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착각은 자유라 하며 실없이 장난 삼아 즐기지만 하나님에 대한 착각은 신앙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성경에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기록된 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호리라도 오해하거나 곡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우리에게는 강력한 능력이 됩니다.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요나4:6-9                  박 넝쿨(Ⅰ)

   사람은 작은 것에 쉽게 감동합니다. 때론 이것이 지나쳐서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명분도 없는 일에 이성을 잃어버리고 무모한 짖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 같은 심리는 이기주의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매사를 자기 중심적으로, 특히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판단하고 또한 처리하는 심보를 의미합니다. 박 넝쿨에 대한 요나의 민감한 반응에서 우리는 한번 더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Ⅰ.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는 요나(6절)
   급조하였기에 엉성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초막에 앉아 니느웨 성읍의 망하는 꼴을 보려고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요나에게 예기치 않는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덩굴 식물의 일종이었습니다. 살며시 싹을 틔운 뒤 아주 빠른 속도로 덩굴손을 뻗으며 초막을 감겨 오르기 시작하였고 이내 작열하는 태양 빛을 막기에는 설긴 초막을 절묘하게 뒤덮었습니다. 설긴 초막 사이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뜨거운 햇볕을 인하여 쾌나 고생하고 있었던 차에 이 얼마나 좋은 그늘이 만들어 졌는지 모릅니다. 요나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겨워했습니다. 어쩌면 요나는 하나님의 이 같은 자신을 위한 배려에 감동하며 감사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초막에 어우러져 근사한 그늘을 연출하고 있는 박 넝쿨이 어쩌면 그렇게도 사랑스러워 보이는지요. 니느웨 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었던 처사에 몹시 불쾌하였던 감정이 이 작은 식물을 인하여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Ⅱ. 박 넝쿨을 인하여 성을 내는 요나(9절)
   어제 낮동안 박 넝쿨로 뒤덮힌 시원한 그늘에서 편한 시간을 보냈던 요나는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 끔찍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어제도 멀쩡하고 싱싱했던 박 넝쿨이 바짝 시들어 죽어있지 않습니까? 원인은 해로운 벌레의 인정 사정없는 공격이었습니다. 동이 트기 전 새벽 해충이라는 놈이 박 넝쿨을 깨끗이 갉아 먹어버렸습니다. 요나는 몹시 기분이 언짢았고 그 같은 불쾌한 기분은 뜨거운 햇볕이 곧바로 머리위로 떨어지는 한낮에 이르자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고마운 박 넝쿨이 제공하였던 시원한 그늘이 몹시 아쉬워졌고, 고약한 해충이 지독하게 미웠고 또한 이글거리는 태양이 너무도 싫었다. 그나마 부는 바람도 열기로 한껏 달아오른 열풍이었기에 숨조차 제대로 내쉬기 어려웠습니다. 열사병이라도 걸린 듯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는 게 이렇게 힘들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백 번 낫겠다라는 마음이 다시금 간절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죽여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의 부르짖음은 분노와 불만으로 가득 담겨져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참 고맙고 유익한 박 넝쿨을 왜 고약한 해충이 갉아 먹어버려 이토록 고생시키시는지요? 이글거리는 햇볕으로 날 태워 죽이려고 작정이라도 하셨습니까?

   하나의 식물에 불과한 박 넝쿨에 요나는 자기 인생을 걸었습니다. 작은 박 넝쿨에 희희낙락하기도 때론 불같은 성을 내기도 하는 요나. 얼마나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가에 따라 그는 반응하였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인생입니까? 사소한 것에 섣불리 행동하는 모습이 하나님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질까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아름답고 의미 있지만 철저히 자기 입맛에 따라 사소한 것에도 지나치게 반응하는 모습은 참으로 추하기 짝이 없습니다.         


성경:요나4:6-9                 박 넝쿨(Ⅱ)

   지금까지 당신은 주 하나님을 향하여 못마땅히 여겨 화를 낸 적이 몇 번이나 됩니까? 감히 성을 낼 수 있습니까? 라고 오히려 반문할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인 주제에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존귀와 영광 중에 거하시는 주 여호와 앞에 설 때마다 거룩한 두려움에 압도되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 하나님께 대들다가 화가 미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우리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를 가혹하리만큼 다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가슴속에 원망과 불만이 격한 감정으로 소용돌이치기도 하지만 그럴 경우도 노골적으로 속마음을 잘 드러내놓지를 못합니다. 다만 속으로 움츠러 들 뿐입니다.

Ⅰ. 간(肝) 큰 요나(9절)
   하룻밤 사이에 시든 박 넝쿨을 보자 울컥 솟는 분노에 자기 통제를 잃어버린 요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거칠게 대들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요나에게 경고했습니다. 박 넝쿨을 인하여 너는 하등의 성낼 아무런 자격도 없다. 그러나 요나는 수긍하지를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실컷 분노의 감정을 터트리고 죽어도 좋다고 항변합니다. 절 보고 화내지 말라니요,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에게는 화를 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을 모르고 계십니까?( I am angry enough to die. ) 악에 바쳐 바짝 달라붙습니다. 며칠 전에도 불의하게 성내다가 하나님께로부터 책망 섞인 따끔한 지적을 받았는데(요나4:4)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참 간 큰 사람 요나입니다.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하여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입에 담지 못할 무례한 언사를 쏟아 부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입김에 목숨이 달려 있는 연약한 인간인 것을 우리는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Ⅱ. 박 넝쿨
   살아가며 주변에서 만나는 식물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위하여 박 넝쿨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를 가르치고자 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박 넝쿨을 주연 배우로 출연시키고 해충과 이글거리는 햇볕을 조연으로 쓰셨습니다. 뜨거운 태양빛을 가려주다가 해충에 의해 한순간 시들어 죽은 박 넝쿨을 보며 요나는 단지 자신에 관계된 이해득실을 따졌고, 그리고 거기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을 하며 감정을 처리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계속 이어지는 10절 이하에서 박 넝쿨을 통한 하나님의 값진 교훈을 보게됩니다. 요나에게 무엇을 보여주시려고 또한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박 넝쿨을 사용하셨는가를 무릎을 치며 감탄을 하게됩니다.

   때때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 주변의 작은 것들을 사용하시어 가르쳐 주시기도 하십니다. 영적으로 늘 깨어 있는 삶이 필요합니다. 불쑥 내 뱉는 아이의 거슬리는 말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실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지나쳐 버리는 작은 사건에 우리의 심금을 만져주는 주의 놀라운 가르침이 담겨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무심코 읽어 내려가는 신문기사를 통해 오늘 나에게 다가 오시는 주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거실을 물걸레로 닦다가 힘든 허리를 잠시 펴며 베란다에 눈길을 돌리는데 언뜻 들어오는 난초의 꽃이 잊었던 주님의 감미로운 손길을 느끼게 해줍니다. T.V 화면에 잡힌 어느 노숙자의 잔뜩 주름진 얼굴을 보는 순간 편히 누울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있다는 사실에 가슴 뭉클한 주님의 은혜를 느낍니다. 고등학교 친구로부터 반갑게 받은 전화통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 답답한 문제에 명치끝이 얹혀 있었던 심정이 통화 중에 오간 이야기 가운데 뜻밖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자 참 기이하게도 섭리하시는 주님의 배려를 깨닫기도 합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받고 승용차 안에서 기다리다가 횡단보도를 건너가며 조잘거리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모습 속에서 주님의 책망을 발견 할 수도 있습니다. 박 넝쿨, 바로 우리가 주변에서 부닥치는 작은 것들을 통해서도 주님은 우리를 효과적으로 교훈 하실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경:요나4:10-11              하나님의 심정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심정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심정은 정도(正道)에서 벗어나기 쉬운 우리네 삶에 은혜의 고삐 역할을 효과적으로 감당하여 주고 또한 매일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삶에 자칫 마음이 흐려져 영적 방심의 늪에 빠지기 쉬운 우리네 자세에 자극을 줍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심정을 알기에 힘쓰며 아울러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네 삶을 진정 가치 있게 만들어 줍니다.

Ⅰ. 박 넝쿨의 교훈
  불과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죽은 박 넝쿨을 보며 극단적인 감정을 표출한 요나를 보시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심지도 돌보지도 그리고 기르지도 아니한 박 넝쿨 하나를 넌 그토록 아꼈는데, 자 한번 생각해 봐라. 영적으로 눈이 가려져 있어 자기네들이 걷고 있는 길이 멸망하는 길임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니느웨 성의 자그만치 십 이만여 명의 이 가련한 영혼들을 내가 아끼는 심정, 넌 그 심정을 이해하겠니? 넌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로 들어갈 식물 하나를 무척이나 아꼈는데 말야. 입장 바꿔 놓고 곰곰이 생각해 봐라. 네가 얼굴 붉히고 불같이 성낼 만한 일이었던가? 눈초리 치켜 뜨고 나에게 거칠게 대들었는데 내가 너에게 심하게 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근시안이고 지극히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요나를 가르치시기 위하여 박 넝쿨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니느웨의 불쌍한 심령들을 그토록 사랑하시는 심정을 요나에게 보여주시기 위하여 박 넝쿨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Ⅱ. 구원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불의를 슬쩍 눈감아 주시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죄에 대한 상응한 대가를 치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 죄인인 우리는 뼛속까지 떨리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누가 하나님의 공의를 피하여 지나갈 자 있습니까? 그렇다고 절망 가운데 고통의 수렁으로 빠져들지는 마시오. 여기 소망의 빛이 있습니다. 한가지 놀라운 진리가 우리네 가슴속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어옵니다. 이 진리는 우리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죄악 가운데 멸망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진정 하나님은 원하십니다(디모데전서2:4). 악인이 망하는 것을 우리 주님은 조금도 즐거워하지 않으십니다(에스겔18:23). 죄인이 불의에서 돌이켜 떠나 구원에 나아가는 것을 우리 주님은 크게 기뻐하십니다(에스겔33:11). 그러기에 죄인이 회개하는 자리로 나아가도록 기회를 반드시 주십니다. 니느웨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죄악 가운데 망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주님의 심정이 불같이 타오릅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요나를 보내어 회개하는 자리로 나아 오도록 은혜의 기회를 주셨고 그들이 재 가운데 뒹굴며 마음을 찢고 진정 통회 자복하는 모습을 보시자 우리 주 하나님은 너무도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러한 주님의 심정을 가슴으로 담아 내지를 못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요나는 '박 넝쿨도 네가 그토록 아꼈다면, 나는 얼마나 니느웨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겠는가?' 라고 말씀하시는 주 하나님 앞에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을 것입니다. 지옥의 자리가 늘더라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는 우리네 무딘 심령에 확 불을 붙여 주는 말씀의 교훈이 바로 요나서입니다. 지옥의 자리가 텅텅 비고 천국의 자리가 차고 넘치기를 그토록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주님의 심정을 꿈에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옥 불구덩이로 달려가고 있는 영혼들을 아무런 느낌도 없이 멀뚱멀뚱 바라다보고만 있다면 아직 우리 주 하나님의 그 뜨거운 심정을 제대로 가슴에 담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화들짝 놀라며 거꾸러져야 합니다. "오, 주님,  주님의 심정을 품고 살게 하소서!"
    

 



   



  인기검색어
kcm  339707
설교  172951
교회  126145
아시아  100436
선교  96457
세계  86697
예수  83797
선교회  73886
사랑  70091
바울  69264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