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개역개정   KJV   NIV   공동번역   북한성경   Afr1953   BulVeren   Dan   GerElb1871   GerElb1905   GerLut1545   GerSch   UMGreek   ACV   AKJV   ASV   BBE   DRC   Darby   ESV   Geneva1599   GodsWord   HNV   JPS   Jubilee2000   LITV   MKJV   RNKJV   RWebster   Rotherham   UKJV   WEB   Webster   YLT   Esperanto   LXX(o)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kcmseoul  작성일  2008-04-11
 자료구분  주제어  주제어  삼손의 출생
 내용

성경;사사기13:1                길고 긴 40년

  사십년 동안 다른 민족에게 지배를 받는다면 그 고통이 얼마나 클까요? 지난 날 포악한 일본인들에 의해 36년간의 강점과 학정을 겪었던 우리로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Ⅰ. 이스라엘의 범죄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음으로"(1절 상반절). '다시', 못된 습관이 재발합니다. 먹고 살 만하니까 슬슬 옛버릇이 고개를 쳐듭니다. 등 따습고 배불러지니까 뭐 좀 흥미 있는 일이 없을까 하며 주변을 기웃거립니다. 주 하나님 섬기는 생활에 서서히 싫증을 느낍니다. 이웃에 있는 이방 잡신들이 훨씬 매력적이라 여겨집니다. 하나님 섬기는 법도는 너무 딱딱하고 제약이 많이 따르는 불편함이 있다고 투덜거립니다. 반면에 주변 이방 민족들이 위하는 우상들은 아주 자유분방한 재미와 스릴이 있게 보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자손들은 또다시 영적 타락의 길로 들어섭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헛된 우상을 섬기는 그릇된 열심에 빠져듭니다. 타락한 인간은 죄를 즐기려는 죄의 성향을 띠고 살아갑니다. 잘못에 대하여 그렇게 매맞아도 여전히 옛날의 죄악된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동경합니다. 부패한 인간의 강퍅함은 다스리기 힘듭니다. 선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있어도 몸은 죄의 방탕함을 즐깁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여전히 옛 생활 옛 습관을 온전히 끊지 못하고 지냅니다. 그러기에 죄성을 지닌 육체의 욕구와 맞서 처절한 싸움을 끊임없이 벌여야 합니다. 이러한 영적 싸움은 평생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된 이스라엘 자손들은 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상태로 지낸 것이 아닙니다. 신앙으로 제대로 서서 의미 있는 생활을 하는가 보다 하면 언제 그렇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푹 주저앉아 딴 짓을 벌입니다. 마치 하나님하고 신앙과 타락의 갈림길에서 숨바꼭질하는 꼴입니다. 그래서 얻은 이득이 무엇입니까? 온통 상처투성이입니다.

Ⅱ. 40년의 고통
  "여호와께서 그들을 40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1절 하반절).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우상 섬기는 일에 바빠진 이스라엘 자손들을 우리 주님은 또다시 징계의 채찍을 듭니다. 택한 백성이 아니라면 아예 망하게 내버려두겠지만 주께서 언약하신 자녀들이기에 사랑의 매를 들어 때리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범죄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방인 블레셋 사람들의 포악한 손에 맡기십니다. 그 기간이 40년입니다. '40년', 사사시대를 통틀어 가장 길었던 고통의 시절입니다. 그 이전에 이방 민족들에 의해 학대받았던 기간 중 가장 길었던 때가 가나안 왕 야빈에게 이스라엘이 20년 동안 갖은 수모와 학대를 받았던 시절입니다(사사기4:1-3). 그 때보다 꼭 배나 길었던 시기입니다. 육체적으로 시달렸던 40년, 그리고 영적 암흑기인 40년,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이 겪은 고통은 참으로 컷을 것입니다. 성경은 간단하게 한 절로 국한하여 기록하고 있지만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이 겪은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굳이 글로 옮긴다면 몇 권의 책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조부모가 겪은 일제 36년에 대하여 할 말이 많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얻은 것은 40년의 고통입니다. 하나님 자리에 대신 가증한 우상을 앉혀놓고 얻은 것은 복이 아니라 피눈물이 흐르는 고통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누리는 주님의 보호막이 사라지면 살벌한 세상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무방비 상태로 떨어집니다.


성경:사사기13:2-7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은 상식에 매이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따릅니다. 그러기에 암담한 현실에 그리스도인들은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믿음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눈앞에 사실로 드러납니다. 본문의 마노아의 가정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Ⅰ. 마노아의 가정
  마노아, 그는 단 지파에 속하였고 주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불임(不姙)여자였습니다.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2절 하반절). 가정의 아픔이요, 부부의 고통이었습니다. 자식은 주 하나님의 복의 상징이기도 하는데 자녀가 없습니다(시편127:3). 아마 이로 인해 마노아 부부는 많은 갈등과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남모르는 눈물도 많이 흘렸을 것입니다. 아들 딸 쑥쑥 잘 낳는 이웃 여인들을 보며 마노아의 아내는 주눅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을 광장에서 뛰어 노는 다른 집 아이들을 보노라면 가슴이 시리도록 아쉬워했을 것입니다. 아이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허구한날 간구 하였을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마노아의 아내는 임신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정확한 진단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자궁에 심각한 이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3절)에서 '잉태하지 못하다' 라는 낱말이 히브리어로 '   '(아카르)인데 생식기관이 절제(切除)된 것처럼 도무지 임신할 수 없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성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마노아의 아내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안따깝고 가슴 아픈 현실입니까? 이렇게 마노아의 가정은 커다란 아픔을 지닌 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세상 어느 구석을 눈 씻고 자세히 들여다봐도 이들 가슴 아픈 부부에게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비법이나 의학 기술은 보이질 않습니다.

Ⅱ. 무(無)에서 유(有)로!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3절 하반절). 할렐루야! 굳 뉴스(good news)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불쌍한 여인, 마노아의 아내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굳게 닫힌 태의 문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분명히 무에서의 유로의 창조역사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식은 인력(人力)으로 얻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태의 문을 열어 주셔야 낳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자식을 원해도 생명의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닫아버리면 소용없습니다. 반면에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명이 났더라도 하나님이 태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시면 떡두꺼비같은 아들을 또한 공주 같은 딸을 낳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우리 하나님은 능히 하십니다. 이 놀라운 주 하나님의 약속을 직접 받은 마노아의 아내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우리네 가정에 무엇이 문제입니까? 무엇이 없습니까? 사방이 꽉 막혀 전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낙심하고 있습니까? 마노아의 가정을 돌아보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돌아보십니다. 현실의 장벽이 믿음의 세계에서도 장벽으로 여전히 위세를 떨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주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위 사람들이 볼 때는 마노아의 가정은 영원히 무(無)자식의 가정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노아 부부도 역시 그렇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그곳에서 나타났습니다.  
    


성경:사사기13:2-7                 마노아의 아내

  마노아의 아내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름 석자 드러나지 않은 채 등장한 여인, 마노아의 아내입니다. 그녀에게서 특이한 점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Ⅰ. 약속을 받은 여인입니다(2-5절)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여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3절 상반절). 자식이 없는 마노아의 가정에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의 아내를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주의 사자로부터 받습니다. 그녀는 말씀을 받기에 감당할 만한 믿음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나 감당하지 못합니다. 진주는 개나 돼지가 감당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말씀을 받아도 우습게 여기고 행동합니다. 반면에 어떤 이는 받은 말씀을 붙들고 삶의 현장으로 들어갑니다. 주의 말씀을 감당하는 신앙과 그렇지 않은 불신앙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식 없는 마노아의 가정에 단순히 아들 하나 안겨주려고 찾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주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지도자로 쓰임 받는 아들을 주시려고 찾아 오셨습니다. "그가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5절 하반절).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정말 엄청난 약속이요, 정말 예사롭지 않은 아들입니다. 이 말씀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감당할 만한 신앙이 따로 있습니다. 그가 바로 마노아의 아내입니다. 주님은 마노아의 믿음을 보시고 그녀에게 놀라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Ⅱ. 영적 분별력이 있는 여인입니다(6-7절)
  주의 사자로부터 엄청난 약속의 말씀을 홀로 받은 마노아의 아내는 남편에게로 달려가 그대로 전합니다. 이때 그녀가 한 증거 가운데 이러한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임하였는데 그 용모가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6절 상반절). 그녀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여 준 자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와 같다' 라고 합니다. 참으로 예리한 영적 분별력을 가진 여인입니다. 영적 탁월함이 없이는 이렇게 단번에 분별하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사자'라고 확정짓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자와 같다고 고백합니다. 찾아 온 하나님의 사자는 우선 분명히 그녀에게 나는 하나님이 보낸 사자라고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로 그녀의 영적 탁월함입니다. 이 부분은 남편이 보여 준 태도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남편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고도 반신반의했다가 나중에야 하나님의 사자임을 알아봅니다(사사기13:7-22). 반면에 마노아의 아내는 단번에 분별합니다. 비록 커다란 두려움에 압도되어 아무 소리도 아무 물음도 하지 못하고 잠잠히 듣기만 했지만 그녀의 눈은 하나님의 사자임을 짐작합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이름도 없습니다. 무명의 여성도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녀가 마노아의 아내라는 사실과 후에 사사 삼손의 생모였다는 사실뿐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믿음은 위대하였고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주의 말씀을 감당하는 신앙의 여인이었고 아울러 영적 분별력이 탁월한 여인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자극이 됩니다. 이름이 천하에 드러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루는 아름다운 통로로 얼마든지 쓰임 받을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사사기13:8-23                   마노아

  우리는 믿음이 여기면서도 실제 삶 속에서는 너무도 연약한 모습으로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 지식은 많이 있어도 적용 부분에 이르러서는 불신앙의 모습을 드러내곤 합니다. 삼손의 부친인 마노아는 우리처럼 연약한 믿음을 가지고 근근히 신앙생활 하던 인물로 본문에서 부각됩니다. 동병상련의 심정에서 한편으로 위안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도전이 되는 사건입니다. 주님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소서!

Ⅰ. 듣는 믿음보다 보는 믿음
  마노아는 아내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듣고 선뜻 믿지를 못합니다. 마치 의심 많은 도마처럼 행동합니다(요한복음20:24-25). 눈으로 보지 못하여도 귀로 듣기만 하고서도 믿을 수 있는 좀 더 성숙한 신앙에 이르지 못한 마노아입니다. 그래서 지체없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8절). 진짜로 주님께서 아내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라고 재차 확인하는 정도도 아닙니다. 아예 자신의 두 눈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보아야 납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일은 없던 걸로 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의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끝난 일일지 모르지만 마노아 자신은 아니다 라는 억지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를 또 다시 주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말씀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 마노아의 불신앙과 연약함을 탓하지 않으시고 주의 사자를 다시 보내시어 마노아에게 하신 말씀도 전에 그의 아내에게 하신 말씀하고 다르지 않고 똑같습니다(13-14절). 주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특별히 덧붙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순전히 간접적으로 듣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것이 확실하다 라는 마노아의 덜 성숙한 신앙 때문입니다.

Ⅱ. 무딘 영성(靈性)
  인자하신 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마노아는 주의 사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인줄 알지 못하고 단순히 하나님의 사람정도로만 여깁니다. 그의 아내는 사전 지식도 없이 단번에 하나님의 사자라는 심중을 굳혀가고 있었는데 마노아는 그렇지를 못하고 엉뚱한 행동을 합니다(15-16절). "이는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지 못함을 인함이었더라"(16절 하반절). 게다가 주의 사자에게 이름까지 물어봐 알고 나서도 하나님의 사자인즐 깨닫지 못합니다. 결국 주의 사자가 이적을 행한 다음에야 마노아는 그가 하나님의 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19-21절). 마노아의 영성이 참 둔하다는 증거입니다. 그의 무딘 영성이 하나님의 사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또 한번 드러납니다.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22절). 어처구니없는 염려와 공포입니다. 그의 아내의 증거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23절). 아내의 영성에도 미치지 못한 마노아입니다.

  직접 자신의 두 눈으로 보아야만 믿을 수 있다는 마노아, 영적 분별력이 둔하여 빈약한 영성을 갖춘 마노아, 이러한 마노아를 우리 하나님은 용납하여 주셨습니다. 그의 간구대로 또 한번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그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셨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마노아에 대조되어 우리 하나님의 긍휼이 풍성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본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탓하지 않으시고 굳게 세워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성경:사사기13:24-25                삼손의 등장

  사무엘 이전 사사 중 기드온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사사로 불려지는 삼손이 드디어 등장합니다.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24절 상반절).

Ⅰ. 하나님의 복을 먹고 자란 아이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24절 하반절). 믿는 가정의 부모라면 당연히 자녀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을 매우 원합니다. 삼손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그가 하나님의 복을 입었다는 점입니다. 성장기를 주 하나님의 복에 둘러싸여 보낸 삼손입니다. 참된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입니다. 주님의 복을 받았다는 것은 인생여정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삶의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은혜가 배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복은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삼손이 자라가면서 필요한 부분들이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믿음, 지혜, 지식, 건강 등등입니다. 우리는 우리네 자녀들에게서 어떠한 모습을 기대합니까? 바로 내 아이는 하나님께 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험악합니다. 사랑스런 자녀들이 마음껏 뛰어 놀기엔 너무도 위험합니다. 스펀지처럼 흡수성이 강한 성장기를 거쳐가는 동안 못된 영향을 받을까봐 무척 염려되는 세상입니다. 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우리네 자녀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주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 가운데 우리의 자녀들이 커가야 마음을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주님께서 삼손에게 복을 주셨다는 사실은 삐뚤어지지 않고 올곧게 믿음으로 잘 자란 삼손임을 보여줍니다.

Ⅱ. 성령이 임한 삼손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임하시니라"(25절). 이 구절은 삼손이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려고 소명을 받는 대목입니다. 나실인으로 죽 구별된 삶을 살았던 삼손이 드디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면에 나섭니다. 그 출발점이 하나님의 영, 성령이 강하게 임한 때입니다. 잘 준비된 삼손에게 어느 날 주님은 영으로 찾아오십니다. 그의 마음을 감화시키사 더욱 온전히 주님을 위하여 일어서게 만듭니다. 주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으로 이끌림을 받아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일은 사람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오직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깊은 속에 있는 뜻은 주의 영 성령이 아니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에 붙들린 삼손은 그의 남은 여생을 주님을 위하여 맹렬하게 불태웁니다. 우리는 서둘러 주님의 일을 이루려는 의욕을 앞세우기보다는 우선 주님의 영으로 충만해지기를 간구 해야 할 것입니다.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던 삼손이 역사의 전면에 어떻게 등장하는 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두 가지가 아주 인상 깊이 우리들의 가슴에 부딪쳐옵니다. 하나는 그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였고 다른 하나는 그가 성령에 붙들린 자였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삼손의 삶이 기대됩니다.

 



   



  인기검색어
kcm  332237
설교  169616
교회  123018
아시아  97820
선교  94049
세계  84220
예수  81510
선교회  72225
사랑  68794
바울  67825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