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룻기4:1-12 보아스의 열심(2)
기업 무르기에 대한 배턴이 나오미의 손에서 보아스의 손으로 건네 지자 보아스는 앞으로 힘껏 달려나갑니다. 보아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Ⅰ. 기업 무를 자를 만남 먼저 보아스는 나오미 가정의 기업 무르기에 대한 우선권이 있는 자를 만납니다(1절). 그리고 성읍 장로들을 초청하여 증인으로 내세웁니다(2절). 모든 여건이 만들어지자 보아스가 자기보다 기업 무르기에 우선권이 있는 사람을 보고 적극적으로 기업 무르기에 나설 것을 권합니다. 이에 그 사람은 망설이지 않고 나오미 가정을 위한 기업 무르기를 기꺼이 감당하겠다고 선언합니다(3-4절). 하지만 이방 여인 과부 룻을 아내로 맞아 들여 대를 이를 후사를 남겨야 한다는 보아스의 부언에 그는 멈칫하여 기업 무르기 포기를 선언합니다(5-6절). 이유는 혹시 모를 손해에 대한 염려가 컸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6절 상반절), 이렇게 말하며 결국 나오미 가정의 기업 무르기에 대한 권리를 보아스에게 넘겨줍니다.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6절 하반절). 위험 부담이 따르는 기업 무르기에서 손을 뺍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기업 무르기가 상당한 자기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보아스가 나오미 가정의 기업 무르기에 손발 걷어 부치고 나선 일은 대단한 결단과 헌신이 따랐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보아스가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르기를 거부하였다면 이처럼 열심 내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대개 사람은 자신이 손해 보는 일에는 끼여들기를 꺼려합니다. 될수록 안전 위주로 걸어가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리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이해타산을 저울질하며 일을 처리하지 않습니다. 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명분이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대가도 치르겠다는 각오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오미 가정을 위한 기업 무르기에 적임자는 딱 두 사람, 보아스와 그가 만난 다른 한 사람뿐입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나서야 나오미의 가정 문제는 해결됩니다. 만일 두 사람 모두 꽁무니를 빼면 나오미 가정으로서는 절망적입니다. 아마 나오미 가정에 여러 유리한 조건들이 많이 존재하였더라면 결과에 대하여 그리 비관적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나오미 가정은 열악한 조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 상태가 나오미 가정의 현주소입니다. 기업 무르기의 적임자는 이 모든 열악한 상황을 바꾸어 놓아야 합니다. 게다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여야 하는 부담은 더욱 심리적으로 위축을 시킵니다. 나오미의 가정을 위한 기업 무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가장 가까운 적임자도 손을 들고 물러 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오미의 가정을 긍휼히 여기셨기에 보아스의 마음을 움직여 그 짐을 즐거이 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보아스는 자기 자신을 위해 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뛰는 것을 앞세웠던 자입니다. 나오미 가정의 일을 자기 자신의 일처럼 여기고 쉬지 않고 달려가는 그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일말의 사심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도 역시 나오미 가정을 위한 기업 무르기에 대하여 갈등하였을 것이고 또한 뒤로 빼려고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한 실리를 좇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명분을 좇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것도 엄청난 열심을 쏟아 부으며 실천합니다.
성경:룻기4:1-12 보아스의 열심(3)
주께서 명한 규례대로 열심히 뛴 보아스는 마침내 나오미 가정의 기업 무르기에 대한 권리를 획득합니다. 이에 대한 확실성을 나타내기 위해 보아스보다 우선권이 있었던 자가 자기의 신발을 벗어 그에게 건네주며 기업 무르기 이양을 장로들과 모인 성읍 사람들 앞에서 공표합니다(7-8절).
Ⅰ. 보아스의 선서 나오미 가정을 위한 기업 무르기 권리를 획득한 보아스는 엄숙하게 성실한 이행을 선언합니다(9-10절). 끝까지 원리 원칙에 충실하는 그의 진지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결과와 열매에만 집착한 나머지 적법한 절차를 담은 과정을 편의주의로 적당히 꿰어 맞추려고 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이익을 되는 일에는 불법도 개의치 않고 행하려 듭니다. 보아스는 이러한 세태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정도를 우직스럽게 고집합니다. 아무리 빠른 지름길이라 할지라도 길이 아니면 발을 내딛지 않았으며 반면에 아무리 먼 에움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이 정도라면 기꺼이 돌아서 걸어갔던 자가 바로 보아스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원칙을 지켰고 법도를 준수하였습니다. 나오미 가정을 위하여 기업 무르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보아스는 자기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고 또한 이를 만인이 보는 앞에서 만인이 듣는 앞에서 조목조목 성실한 이행을 선언하였습니다. 실제로 그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승리를 자축하며 마냥 웃으면서 걷기엔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사라 질 위기에 놓인 나오미의 가정을 떠맡아야 하며 또한 이방 여인이고 과부인 룻을 아내로 맞아 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것도 피하려 들지 않습니다. 선별하여 어깨에 지기 가벼운 짐만을 지겠다고 고집부리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감당하겠다고 당당히 밝힙니다.
Ⅱ. 축복하는 사람들 이러한 보아스를 보며 둘러 선 장로들과 성읍 사람들은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크게 축복을 빌어줍니다(11-12). 보아스의 신앙과 인격에 대한 신뢰가 컸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지려고 한 보아스의 자세에 대하여 경의를 표합니다. 그들이 보아스에게 거는 기대와 축복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보아스의 성공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대 잇기 성공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축복에는 룻이 열쇠를 쥐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즉 룻을 통해 보아스의 집이 왕성하여짐으로 더욱 유명해지고 또한 그녀를 통해 후사가 얻어짐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룻에게 모아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의 신앙과 인격에 룻의 신앙과 인격이 어우러져 더 큰 효과를 기대하는 심리가 베들레헴 사람들의 가슴속에 넓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룻의 역할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보아스의 열심에 박수를 치시며 힘껏 밀어주셨습니다. 사심을 버리고 거룩한 명분을 좇아 손해도 마다하지 않는 그의 자세에 대하여 합격 통지서를 보내주셨습니다. 신앙적 열심은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물론 보아스에게도 위기도 있었습니다. 보아스보다 우선권이 있었던 사람이 나오미 가정을 위한 기업 무르기를 감당하겠다고 선언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장담할 수는 없지만 다윗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혈통적 구속사의 흐름이 다른 방법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즉 보아스는 영광스러운 혈통적 구속사의 본 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떠한 자를 들어 사용하시는 가를 다시 한번 자세히 눈 여겨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룻기4:13-17 나오미의 하나님
모든 일에는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유종(有終)의 미(美)'는 모든 일에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네 신앙도 유종의 미를 이루어 주시는 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우리가 진행 과정을 보면서 쉽게 판단하여 결론을 내리려는 태도를 지양해야 함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끝을 보기 전까지는 섣부른 결론은 금물입니다.
Ⅰ. 나오미의 인생 여정 지난 날 나오미의 삶은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성공과 번영을 꿈꾸던 기대감은 바위에 부딪쳐 물거품처럼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만 쓰라린 인생이었습니다. 남편이 죽고 두 아들 마저 죽는 비극은 그녀로 하여금 더욱 절망적인 상황으로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이름에 대한 강한 거부감마저 들었습니다. "나를 나오미(희락)라 칭하지 말고 마라(괴로움)라 칭하라"(룻1:20). 그녀의 얼굴엔 깊은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녀 스스로 내 인생은 이다지도 비참한 꼴로 얼룩이 질까 하며 고통에 몸을 떨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뚜렷한 해결책도 보이지 않습니다. 온통 절망과 한숨뿐입니다. 이렇게 내 인생은 끝나는구나! 정말 나오미의 인생은 그렇게 비참한 꼴로 끝났습니까?
Ⅱ. 나오미를 돌아보시는 하나님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듯한 고통에 몸을 떨며 긴 한숨을 내쉬고 있는 나오미를 우리 주 하나님은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마라라 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나오미의 등을 어루만져 주시며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은 며느리 룻을 통하여 아들을 얻게 하신 일입니다(13-17절). 늙은 과부 나오미에게 대를 이를 아들이 생긴 일이 얼마나 기쁘고 의미가 있으면 베들레헴 동네 여인들이 나서서 야단법석을 떨었겠습니까?(14-15절) 이제야 나오미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본래의 이름 나오미라는 명칭에 걸맞은 삶이 새롭게 전개된 것입니다. 누가 나오미의 노년이 행복과 기쁨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대가 끊길 위기에 몰리고 손에 남은 것은 가난과 궁핍뿐인 늙은 과부 나오미를 보며 그저 동정심이나 느꼈을 것입니다.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노, 쭛쭛, 참 안 됐네! 나오미 자신도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흉물스러운 초가집 같은 나오미의 인생에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꽃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지며 새로운 인생 전환점을 맞은 나오미를 힘껏 축하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크게 축복해 줍니다. 그리고 나오미를 돌아보시는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Ⅲ. 나오미 '나오미'로 시작하였다가 '마라'로 끝날 위기에 놓였던 나오미가 결국은 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금 '나오미'로 인생을 아름답게 장식합니다. 나오미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까지도 그녀가 '마라'에서 '나오미'로 회복될 줄은 몰랐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나오미는 실패한 '마라'입니다. 하지만 주 하나님의 눈에는 '마라'를 통한 '나오미'에로의 회복입니다. 다시금 나오미(희락)라는 명예를 회복케 하시는 주 하나님의 섭리가 나오미의 인생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마라'(괴로움)라는 터널을 지나며 이제 내 인생은 끝이다 라는 절망의 한숨을 토해내고 있습니까? 아직 터널의 끝에 도달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쉽게 절망하기엔 너무 이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버리지 않습니다. 주의 영광을 드러내놓을 수 있는 자리로 반드시 이끌고 가십니다. '유종의 미'가 있다는 확신과 소망 가운데 믿음으로 참아내며 끝까지 견디어 내야 합니다. 나오미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을 품에 안고 가슴 벅찬 감격에 기쁨을 만끽했던 나오미의 모습을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도 재현시켜 주시는 주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봅시다. 하나님이 주실 결과를 보기 전까지는 우리의 입을 함부로 열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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