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사사기10:6-9 계속되는 배도
사람이 얼마나 강퍅한가? 은혜를 누리고 있을 땐 그 은혜의 소중함을 잊고 삽니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은혜를 내버리려고 합니다. 이게 부패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은혜를 입으면 잘할 것 같지요? 천만예요. 틈만 나면 배은(背恩)을 꿈꿉니다. 배은하고 나서 매맞으면 정신 차리고 잘 할 것 같지요? 천만예요. 또 배은을 시도합니다. 먼 나라 사람들 이야기로 들립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야기로 국한된다고 여깁니까? 보세요.
Ⅰ. 다시(Again) "이스라엘이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6절 상반절). 오랫동안 우상숭배에 굶주려 있었다는 듯이 이스라엘 자손들은 사사 돌라와 야일이 죽자 게걸스럽게 우상숭배에 탐닉하기 시작합니다. 우상이란 우상은 다 끌어들입니다(6절 하반절). 온갖 우상이 총망라되어 나타납니다. 마치 이스라엘은 우상 전시장인양 그 당시의 우상들은 다 모아들여 섬깁니다. 이를 위해 당연히 주 하나님을 헌신짝 버리듯 내버립니다.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도무지 있어서는 안될 일이 벌어집니다. 게다가 이런 배도(背道)가 처음으로 발생한 것은 아닙니다. '다시!', 반복적인 악행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예전에 영적 간음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무서운 징계를 받은 적이 여러 번 임에도 불구하고 또 악행이 재발됩니다. 근절되지 않고 단호하게 끊어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되풀이되는 현상은 무슨 연유입니까? 인간의 부패함입니다. 인간의 강퍅함입니다. 신의를 쉽게 저버리는 간사한 심성입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의롭다 자랑하는 이도 별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똑같습니다. 거기가 거기고 그 놈이 그 놈입니다. 죄의 성품이 육신에 머무르고 있는 한 어쩔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또 다시 넘어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어쩜 그럴 수가 있을까 하며 그들의 악행을 비난하기보다는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참 이해하기 힘든 게 인간입니다. 헛된 우상을 위하여 너무도 쉽게 주님을 등지고 떠나가는 이스라엘 자손들, 정말 납득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그 악한 본성이 우리들에게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통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신앙을 은혜를 주님을 썩어질 그리고 멸망할 세상 것들과 바꾸지 않습니까? 은혜와 죄악 사이에서 갈팡질팡 거립니다. 인간의 범죄는 끝이 없습니다. Ⅱ. 그 해부터 또 다시 부패한 죄성(罪性)을 극복하지 못한 가증하고 헛된 우상들을 섬기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향하여 주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십니다(7절). 결국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웃 이방인들에 팔려 학대를 받습니다. "그들이 그 해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니"(8절 상반절). 근 사십 오년간 지속된 평화는 끝이 나고 고통과 한숨으로 얼룩진 불행 속에 살아갑니다. '그 해부터',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을 버린 그 해부터입니다. 주님 저버리고 우상 섬기자 평화는 사라지고 대신 모진 학대가 그들의 손에 쥐어집니다. 주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문제가 생기고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 시점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영적 자가 진단을 해 보면 그 원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원하시지 결코 불행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평온한 삶을 살며 영적 부흥을 경험한 시대와 이방인들의 학대 속에서 신음하던 시대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하나님을 섬겼느냐 아니면 우상을 섬겼느냐에 따라 구분됩니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이스라엘 자손들의 행위에 우리는 성경을 읽어가노라면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그렇게도 정신을 못 차릴까? 계속 하나님을 섬기며 평안과 복을 누리며 살면 좋을 텐데,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별 수 없습니다. 늘 말씀 위에 서 있지 못하고 자주 걸려 넘어집니다. 겸손히 우리의 연약함과 강퍅함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가 통곡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 있을 때 넘어질까 하여 영적으로 깨어있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성경:사사기10:10-18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1)
딴짓하다가 십팔년 동안 암몬 사람들에게 모진 학대를 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제야 정신차리고 다시금 하나님께 돌아와 살려달라고 부르짖습니다(10절). 참 알다가도 모를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매맞고 고통 당하기 전에 주의 말씀 따라 살면 좋으련만, 꼭 몹쓸 짓을 저질러 놓고 다급하니까 수습해 달라고 야단법석을 떠니 말입니다. 이를 지켜보시는 우리 주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주님의 입장에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Ⅰ. 네 문제 네가 해결하라(11-14절)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는 짓을 보니 너무 얄밉습니다. 죽게 다고 아우성치면 불쌍해서 살려주면 또 죽을 짓을 하고 또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또 살려 놓으면 또 돌아서서 몹쓸 짓을 저지르고, 벌써 이러기를 여러 번 째입니다. 그래도 참고 또 참고 넘어가고 또 넘어가고 우리 주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은총을 쉽게 또한 오랫동안 거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질질 짤 때마다 불쌍히 여겨 가슴에 품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다른 태도를 보이십니다.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13절 하반절).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이번에는 어림도 없다 라는 표현입니다. 그 동안 불쌍해서 오냐 오냐 하며 받아주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표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참는데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요? 도무지 상종 못할 몹쓸 인간들이라고 이스라엘을 판단하시고 아예 포기하기로 결정하신 것인가요? 구제 불능한 인간들이라고 더 이상 뒤도 돌아보지 않겠다고 절교를 선언하신 것인가요? 더 나아가 우리 주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너희 환난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14절). 이스라엘의 문제 더 이상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기에 알아서 스스로 문제 해결 방법을 찾으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10절)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정작 하나님은 이스라엘과는 상관이 없는 남남으로 처신하십니다. 왜 내가 나와는 상관이 없는 너희 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느냐 하시는 의도입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 왔다고 되돌려 보냅니다. 철저하게 문전 박대를 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일까요? 분명히 드러난 표현은 다시는 상관하지 않으실 매정한 하나님으로 보여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 부분은 조심스런 해석이 필요합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이 상황 따라 마음이 바뀌는 변덕스런 하나님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을 이어 사사기 1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시금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13-14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언은 단지 엄포용이었을까요? 얄미운 이스라엘 자손들을 잠시나마 괴롭히기 위함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변덕부리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단순한 공갈 협박을 즐기시는 분도 아닙니다. 본문 13-14절은 하나님의 심정이요 원칙입니다.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영적 교제의 단절이 있다는 공의의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이스라엘이 행한 죄악은 충분히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공의와 긍휼을, 원칙과 용서를, 심판과 사랑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분명히 구별됩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분명히 선을 긋고 넘어가십니다. 이스라엘의 범죄가 얼마나 악독하고 저질인지를 우리는 본문 13-14절에 담긴 하나님의 심정에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마땅히 망할 가증스러운 악행을 이스라엘이 감히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죄악이 얼마나 크고 깊은 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은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살펴볼 때 진정 주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사사기10:10-18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2)
원칙을 말하며 공의를 살리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필사적인 매달림을 보시고 긍휼의 은총을 계획하십니다. 어찌된 영문인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죄인을 어디까지 하나님은 용납하시는 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Ⅰ. 그래도 주 하나님! 기대하였던 주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 도와주지 않으시겠다는 충격적인 말을 들은 이스라엘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더욱 바짝 주님께 다가갑니다(15절). 가증스러운 죄를 범한 이스라엘 자손들이지만 그래도 주님밖에 없다라는 신앙으로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인생의 결론은 주 하나님입니다. 설사 주님이 우리를 포기하시려 한다 하여도 나는 결코 주님을 포기할 수 없다 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 부분은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죄악에 대하여 공의의 매로 때리시려고 높이 쳐들고 계신 하나님을 보고 우리가 무서워 도망가거나 이젠 하나님의 은혜를 입긴 틀렸구나 하며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품으로 파고듭니다. 이게 우리네 신앙의 마지막 자세입니다. 두렵고 커다란 매를 보고 이젠 죽었구나 하고 주저앉아서는 안됩니다. 내 죽어도 주님 품에서 죽으리라 하는 비장한 그리고 최후의 카드를 들고 나가야 합니다. 예 좋습니다. 우리가 잘못했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지요. 맞아 죽어도 쌉니다. 주님 마음에 품으신 계획대로 우리들에게 행하옵소서. 하지만 주님, 우리에게는 주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가증한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자기 가운데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16절 하반절). 주님 밖에 없다 라는 결론을 내린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저 주님만 섬기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뒤늦은 뉘우침에 아쉬움이 남지만 그들의 회개는 처절하다 못해 결사적입니다. 이 때 우리 주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실 까요?
Ⅱ.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주 하나님의 선언에(13-14절) 이스라엘이 낙담하지 않고 더욱 필사적으로 주님의 품을 파고들며 동시에 진정 회개의 모습을 보이자 우리 하나님은 마음에 긍휼을 품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困苦)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16절 하반절). '근심하다', 이는 갈등이 생기고 후회하는 심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근심하다'는 히브리어로 ' '(카짜르)인데 몹시 마음 아파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고통 가운데 있는 모습을 보시고 우리 주 하나님께서 매우 마음 아파하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불쌍히 여기시는 모습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덮어두고 지나시지 않고 반드시 심판을 행하시지만 반면에 죄인이 죄 가운데서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진노를 한없이 품지 않으십니다(예레미야3:12).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주님이십니다. 죄는 미워하여도 사람은 사랑하십니다. 다 끝난 일이고 이미 강 건너 간 일이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주님 밖에 없다 라는 절박한 심령으로 파고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보시고 우리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십니다.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말씀하신 주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은 할 말을 잃고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모든 게 끝이다 라는 생각으로 절망에 몸을 떨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밖에 없다 라는 심정으로 매달렸습니다. 주님의 긍휼은 심판보다 큽니다.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강퍅하기에 몹쓸 짓을 수없이 많이 저질러도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주님의 긍휼의 풍성함 때문입니다. 마지막 환난 때에 성도들이 그래도 견딜 만 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주님께서 그 강도의 세기를 감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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