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site   게시판   메일   M1000선교사홈   Mission Magazine

 

 
개역개정   KJV   NIV   공동번역   북한성경   Afr1953   BulVeren   Dan   GerElb1871   GerElb1905   GerLut1545   GerSch   UMGreek   ACV   AKJV   ASV   BBE   DRC   Darby   ESV   Geneva1599   GodsWord   HNV   JPS   Jubilee2000   LITV   MKJV   RNKJV   RWebster   Rotherham   UKJV   WEB   Webster   YLT   Esperanto   LXX(o)  
 현재위치 : HOME > 문서보기


 작성자  kcmseoul  작성일  2008-04-11
 자료구분  주제어  주제어  기드온을 부르심
 내용

성경:사사기6:11-13            이해할 수 없는 일

  우리는 감각적이기에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놓고 판단하려고 듭니다. 전개되고 있는 현실을 마치 전부인 것처럼 믿으려 합니다. 물론 현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드러난 상황이 사실입니다. 문제는 눈앞에 펼쳐진 현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느냐에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이면에 숨겨져 있는데 이를 정확히 캐어내고 바로 이해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해에 빠질 가능성이 커집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어찌 주 하나님의 그 모든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의 뜻을 잘못 해석하는 어리석음은 가급적 버려야 합니다. 본문에서 기드온은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을 향하여 항변합니다.

Ⅰ. 기드온의 오해
  몹쓸 미디안의 눈을 피해 포도주를 짜는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예기치 않은 주님의 방문에 접한 기드온은 순간 자기 귀에 들려오는 천사의 음성이 무척 거슬렸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12절 상반절). '큰 용사'라고 추겨 세워주는 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라는 말에 신경이 날카로워졌습니다. 즉각 가슴에 응어리진 불만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Ⅰ)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Why has all this happened to us?)
  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 한번 잘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지독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현실은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라면 기드온으로서는 현재 겪고 있는 환난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수 없다라는 결론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는 주의 백성들이 이 고생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어지간한 고생도 아니고 민족의 존폐에 직면할 정도로 그 괴로움이 극심한데 그런데도 하나님이 방치할 수 있단 말인가? 기드온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시 당신도 기드온처럼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놓고 갈등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 아니면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Ⅱ)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Where are all wonders?)
  왜 하나님께서 그 크신 능력을 나타내지 않으시냐는 불만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행한 그 엄청난 능력이 다 어디로 갔느냐는 뜻입니다. 기드온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예전의 권능을 행하셨던 하나님께서 당연히 오늘날도 큰 이적과 기사를 얼마든지 나타내시는 주님이시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이 고통받고 있는데도 못본척하며 뒷짐지고 가만히 있을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Ⅲ)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The Lord has abandoned us)
  이스라엘 민족이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14절). 하나님이 버리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생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신앙으로 살려고 애를 썼는데도 환난이 엎친 데 겹친 격으로 끊이질 않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계속 꼬여갑니다. 내가 의지하는 주님은 나의 고난을 방관하듯 그냥 지켜보고만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슬그머니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셨나 하는 서운함과 불만이 생깁니다.

  고난이 길어질 때 우리는 안달이 납니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돕지 않으시나 싶어 신앙에 회의가 생깁니다. 환난의 끝이 안보이고 인내에 염증이 생기면 주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세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과 환난은 그치질 않습니다. 애매히 고난받을 때도 있고 죄가 있어 매를 맞을 때도 있습니다. 기드온은 이 부분을 놓쳤습니다. 어쩌면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한 고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기간이 길어지고 정도를 더해가자 이거 너무 심한 것 아니냐하는 생각에 불만이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자신들도 조심스레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좀 심하게 날 다루지 않나 하는 생각에 회의와 원망에 빠질 위험을 경계해야 합니다. 어려움 속에 있을 땐 곰곰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정한 때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너무 집착하여 주님보다 앞서 가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합니다.  


성경:사사기6:14-18             제일 작은 자도

  주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데서 온전히 드러납니다(고린도후서12:9). 이는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되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실패한 인생으로 한 생애를 마칠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 중에는 과거에 정말 별 볼일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용히 묻혀지고 낙오한 인생이라 여기는 시점에서 주님의 손에 붙들려 180도 달라진 경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날 알아주랴 하며 슬픈 표정을 짓고 앉아 있지 마세요. 하나님이 눈여겨보시고 계십니다. 능력과 지위 그리고 재산에 따라 가치를 정하지 않고 중심(中心)을 따라 살피십니다.

Ⅰ. 기드온
  그는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미디안이 무서워 몰래 밀을 타작할 정도로 소심한 인간입니다(사사기6:11). 든든한 배경이 되는 가문도 아니고, 집안에서도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기드온 스스로도 그렇다고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15절 하반절). '집에서 제일 작다'라는 표현이 막내인지 아니면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힘이 제일 약하다라는 뜻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집에서도 별 볼일 없는 미미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주 하나님께서 무조건 가서 미디안을 쳐부수라는 명령에 대하여 선뜻 순종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약함을 들어 뒤로 꽁무니를 빼려고 합니다. 무시무시한 미디안을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박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 수많은 미디안 사람들을 한사람 처치하듯 너끈히 승리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약속을 받고도 쉽게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 자기에게 엄청난 말씀을 하시는 분이 정말 주 하나님이신 줄을 확인하고 싶다고 당돌하게 요청합니다(17절). 그는 지독한 역경 속에 떨어져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주님은 쌀쌀하게 외면하고 있다고 여겨 원망과 불만이 있는 자였습니다(사사기6:13). 어떻게 보면 정이 뚝뚝 떨어지는 친구입니다.  

Ⅱ. 하나님은 기드온을 들어 쓰셨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기드온을 선택하셨고 그를 들어 미디안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내(하나님)가 너(기드온)를 보낸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도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15절 상반절)하며 불신앙으로 반문한 기드온인데도 말입니다. 친히 하나님이 승리의 보증수표가 되어 주신다고 했으니 아멘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주 하나님 외에 다른 도움이 다른 능력이 왜 필요합니까? 주 하나님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렇듯 형편없는 기드온을 우리 주님은 그를 일꾼 삼으십니다. 전 여기서 감격이 됩니다. 아, 정말 부족하고 형편없고 별 볼일 없는 자라도 우리 주님은 주님의 거룩한 사역으로 부르시는구나! 있다고 잘났다고 좀 한다고 으스대는 자들 사이에 끼어 제대로 기지개 한번 키지 못하는 그런 초라한 자들을, 늘 부족함과 연약함에 몸둘 바를 모르고 때로는 의심에 찬 눈초리로 주님을 바라보기도 하는 아주 작은 자들을 우리 주님은 외면하지 않고 찾으시는구나! 하나님은 주의 능력은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을 나타내고자 친히 약한 자들을 찾으시고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자격미달인 기드온이 주님의 위대한 사역에 부름 받았습니다. 형편없는 믿음이라고 어디에 명함 내밀기가 손이 부끄럽습니까? 나같이 못나고 부족한 자는 주의 일에 쓰임 받을 수 없다고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제일 작다고 여겼던 기드온을 우리 주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약한 자를 강한 자로 들어 사용하시는 분이 우리 주 하나님이십니다.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시고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작은 자에게 능력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사사기6:19-24                여호와살롬!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떠한 분으로 인상 지워집니까? 언제든지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신 푸근한 주님으로 여겨집니까? 아니면 가까이 하기엔 너무도 두려워지는 꽤 성미 까다로운 분으로 생각되어 집니까?  

Ⅰ. 주 하나님을 대면한 기드온(19-22절)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는 의심을 풀고자 궁리한 끝에 기드온은 자기에게 찾아 온 하나님의 사자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듭니다.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믿을 수 있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입니다. 염소 새끼로 요리한 고기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준비하여 상수리나무 아래서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사자에게 가져갑니다. 이에 하나님의 사자는 그것을 널찍한 바위 위에 올려놓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들고 있는 지팡이 끝으로 고기와 빵에 살며시 댑니다. 그 순간 바위에서 시뻘건 불이 나와서 고기와 빵을 삽시간에 태워버렸습니다. 이 엄청난 광경을 목도한 기드온이 너무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할 때 하나님의 사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이 기드온을 감쌉니다. 온몸이 굳어지고 심령이 떨립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22절). 어리석게도 감히 주 하나님의 사자를 의심하여 시험하였다는 후회도 생깁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더러운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게 된 사실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의심이 사라졌기에 기쁨과 안도감이 마음에 자리잡아야 하는데도 오히려 떨림과 공포가 물밀 듯 찾아옵니다. 크고 두려우신 거룩한 주 하나님을 뵈었으니 이젠 죽었구나 라는 생각뿐입니다. 심령이 눈처럼 녹아 내립니다.

Ⅱ. 여호와살롬(23-24절)
  기드온은 자기 생애 이번처럼 두려움에 떨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두려움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두려움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만난 경험에서 받는 두려움은 거룩한 두려움으로 영혼까지 떨리게 만듭니다. 기드온은 두려움 가운데 주님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그 때에 주님의 음성이 귓전을 울립니다.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23절) 주님의 첫마디가 "    "(살롬!)이었습니다. 이 말씀 한마디에 기드온의 심령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두려움이란 실체가 싹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하늘의 평화가 샘물처럼 솟아납니다. 괜히 의심까지 하며 주님을 희롱하였던 기드온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선처입니다. "너는 안심하라!-살롬".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이에 감격한 기드온은 힘을 얻어 급히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살롬"이라고 명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평안의 주님이시다!(The Lord is Peace)"라는 간증입니다. 기드온이 만난 하나님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공포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정 평안을 선포하시는 은혜의 주 하나님이십니다. 기드온은 주님에 대한 인상을 새롭게 가집니다.

  기드온이 만난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기드온에게 살롬을 선포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살롬을 선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두려움 대신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지나친 두려움을 가지고 대한다면 자칫 신앙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금방 얼굴 찌푸리고 화를 내시거나 회초리를 휘두를 하나님으로 만들지 마세요. 벌벌 떨고 있는 기드온을 향하여 인자한 음성으로 평안을 선포하시며 품으로 안아 주신 사랑의 주님이셨던 것을 잊지 맙시다. 후에 기드온이 하나님을 상대로 두 번씩이나 양털가지고 시험하였던 것도 그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두려움보다는 평안이라는 개념이 더 깊이 있게 박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사사기6:36-40절).


성경:사사기6:25-27          먼저 해결해야 할 일

  본문은 기드온을 장차 주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다듬고 다루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데 무엇보다도 주의 일에 사람들이 합당하도록 훈련시키고 다듬는 일을 먼저 하십니다.

Ⅰ. 첫 번째 임무
  제일 미약한 자 기드온을 택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린 첫 번째 명령은 우상의 단을 헐고 대신 하나님을 위한 단을 쌓으라는 것이었습니다(25-26절). 주의 부르심을 입은 기드온에게는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상은 기드온에게 너무 가까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집안에 있는 우상의 단을 부쉈는데도 온 성읍 사람들이 난리를 피운 것으로 보아(사사기6:28) 기드온 집안이 우상 섬기는 데 앞장섰거나 아니면 적어도 기드온의 부친 요아스가 우상을 위한 제사를 주관하는 우두머리인 듯 싶습니다. 그러기에 기드온이 자신에게 친근한 우상의 고리를 끊지 않고서는 주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주님과 나 사이에 놓인 걸림돌들을 먼저 치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거룩하게 드러납니다. 우리 주님은 더러운 죄악에 묻혀 있는 자의 손을 통하여 거룩한 권능을 나타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정결이 필요하면 무엇보다도 깨끗하게 하신 후에 사용하십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 단계를 밟으십니다. 주의 능력은 값싸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는다'라는 것은 이제는 주 하나님을 섬긴다라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이미 개인적으로 기드온은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사사기6:24). 개인의 헌신은 있었고 이제 한 집안의 헌신이 필요하고 나아가 온 성읍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부친 집에 있는 우상을 제거하고 그리고 어디에다가 단을 쌓으라고 했지요? 바로 성(城) 위에 하나님을 위한 단을 쌓으라고 했습니다(26절 상반절). 하나님은 우상을 버리고 제자리를 찾은 이스라엘을 들어서 구원의 은총을 부어주시고 싶으셨습니다. 물론 성읍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회개하고 헌신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알과 아세라가 훼파된 것을 보고 경악과 분개를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도 성 위에 만들어진 여호와를 위한 단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는 큽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뛰어다니기 전에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악습과 불신앙을 움켜쥐고는 주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Ⅱ. 기드온의 순종(27절)
  기드온은 기꺼이 주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연약함이 그에게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가족들하고 성읍 사람들의 비난과 공격을 두려워했습니다. 부친은 물론 온 성읍 사람들이 위하는 바알의 단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서 불사르기가 기드온 마음 같아선 쉬운 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잠든 밤중에 이 일을 조심스럽게 수행합니다. 어찌 보면 기드온은 무척 소심한 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있게 묵상해보면 기드온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낮에 집안에 있는 바알의 단을 깨뜨리고 또 아세라 목상을 장작 쪼개듯 부수고 더 나아가 성 위에 단을 쌓고 그 위에다 칠년 된 수소를 올려놓고 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기드온이 염려한 것처럼 부친을 위시한 식구들이 가만 놔둘 리 없으며 설사 가까스로 식구들은 설득하였다 할지라도 수많은 성읍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자기들이 위하는 우상의 단 부쉈다고 당장 요절을 내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마을 사람들로 인하여 제대로 주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 뻔합니다. 성 위에 여호와를 위한 단을 쌓는 일도 대충 돌 몇 개 주워 다가 만들 수 있는 쉬운 작업도 아닙니다. '규례대로' 라 하였으니 여간 신경 쓰이는 힘든 작업이 아닙니다. 방해받지 않고 성공적으로 주의 명령을 완수하려면 낮보다는 밤이 훨씬 낫습니다. 주의 일이 되는 쪽을 기드온은 생각해 낸 것입니다. 죽음을 무서워하거나 후환이 두려우면 아예 그 엄청난 일을 벌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담대하게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기드온은 주 하나님의 사역자로 쓰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하여 위대한 주의 역사를 성취해 가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하루라도 빨리 구원해 주고 싶으셨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으로부터 먼저 제거되어야 문제가 있기에 우리 주님은 그 부분부터 손을 대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서 우리 가정으로부터 처리되어야 할 문제는 무엇입니까? 주님은 우리와 주님 사이에 놓인 거침돌부터 치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사사기6:28-32          기드온의 부친 요아스

  간밤에 훼손 된 바알의 단을 본 성읍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성안은 술렁거리기 시작하였고 범인을 찾기에 혈안이 됩니다. 마침내 범인이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라는 것을 알고 기드온을 살해하려고 합니다. 이 때 기드온의 부친 요아스가 보여 준 행동이 참 인상적입니다.

Ⅰ. 요아스에게서 배우는 처세훈(處世訓)과 자식 사랑
  첫째, 요아스의 침착성입니다. 그는 분노로 살기 등등한 성읍 사람들 앞에서 조금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성난 폭도와도 같은 군중의 기세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자칫하면 성읍 사람들에 의해 온 가족이 해를 입을 수도 있는 촉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주 침착하게 대처합니다. 이로 보건대 요아스는 그릇이 큰 위인입니다. 소인배는 작은 일에도 쉽게 흥분하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합니다. 사실 요아스도 자기 마음을 다스리기 힘든 입장입니다. 아들 기드온이 감히 부친이 위하는 바알의 단을 파괴시켜 놓았는데 속이 편할 리 있겠습니까? 아들의 행위에 참기 힘든 진노가 목구멍까지 차 올랐는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자기 아들 때문에 온 성읍이 난리를 치며 분노로 들끓고 있으니 냉정함을 유지하기가 더욱 힘들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둘째, 요아스의 정확한 사리분별입니다. 죽을죄를 저질은 아들 기드온을 내 놓으라는 성읍 사람들의 요구에 그는 단순하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죽는 자리에 선뜻 내어 주겠습니까? 백이면 백명 모두 못 내어 주겠다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런데 요아스는 섣불리 처신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우리 아들을 죽이겠다고 내 놓으라고, 무슨 소리야 못내 주겠다" 아마 이렇게 대답했으면 더욱 흥분한 성읍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하였을 것이고 사태는 걷잡을 수없이 악화되었을 것입니다. 못된 아들 감싸들려는 못난 부친으로 오해받아 온 가족이 몰살당할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직시한 요아스는 사건의 본질이 흐려지지 않도록 정곡을 찌르는 발언을 합니다.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31절 상반절). 온통 아들 기드온으로 인해 성난 사람들에게 아들 기드온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마치 불에 휘발유 붓는 것처럼 극도의 감정만 자극할 뿐입니다. 흥분 상태에서는 논리와 이성은 통하지 않고 격한 감정만 난무합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그러기에 요아스는 아들 기드온의 이름을 들먹이며 감싸려 들지 않았고 대신 '바알'을 거론합니다. 이는 요아스가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흔들리지 않는 판단력과 지혜를 가지고 처세하는 모습입니다.
  셋째, 요아스의 용기입니다. 몹시 분개하고 있는 성읍 사람들에게 문제가 왜곡되지 않도록 냉정함을 촉구한 요아스는 아울러 사태의 본질을 흐리게 하며 경거망동하게 행동하는 자는 결코 용서치 않을 것임을 단호하게 밝힙니다. "그(바알)를 위하여 쟁론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음을 당하리라"(31절 중반절).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도 주눅 들지 않고 끝까지 할 말은 용기 있게 다 이야기하는 요아스입니다. 요아스의 말대로 바알이 신(神)이라면 신을 욕되게 한 기드온을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면 됩니다(31절 하반절). 인간이 신을 대신하여 싸운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런 나약한 신을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인간을 위하는 게 순리입니다. 요아스는 이 점을 부각시키며 더 이상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둘러 선 성읍 사람들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합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요아스는 아들 기드온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아들을 감싸는 부정(父情)이 아니라 사리판단이 분명한 자식 사랑이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해도 분명한 가치관과 바른 원칙 하에서 이루어져야 올바른 '자녀애' 입니다. 그래야만 자녀를 올바로 키우고 훈육할 수 있습니다. 심각한 위기에 처한 기드온에게는 정말 좋은 아버지가 있었기에 극복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어떠한 아버지로 어떠한 어머니로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인기검색어
kcm  2546632
교회  1402948
선교  1362537
예수  1287558
설교  1065625
아시아  970863
세계  951035
선교회  916324
사랑  905110
바울  897898


[배너등록]
 

 


홈페이지 | 메일 | 디렉토리페이지 | 인기검색어 | 추천사이트 | 인기사이트 | KCM 위젯모음 | 등록 및 조회

KCM 찾아오시는 길 M1000선교사홈 미션매거진